이제부터는 내가 아는 길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풀코스(42.195Km)를 뛰었던 길이었다. 공식적은 풀코스마라톤 대회는 아니었지만 부피아(부산마피아) 마라톤으로 첫 풀코스를 달렸던 코스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았다. 몸은 힘들고 지쳐 있었지만 이제 반 이상 왔다는 점.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코스로 갈 수 있다는 점이 점점 더 100Km 성공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확신을 들게 했다. 해운대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았다. 밤이라서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라 울트라 마라톤에 참여하는 사람들 외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새벽 4시에도 동백섬을 돌며 운동하시는 분도 계셨다. 울트라 마라톤에 참여하시는 분들 중에는 동백섬 앞 벤치에서 잠깐의 잠을 청하며 누워서 휴식을 취하시는 분도 계셨다. 그분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부러웠다. 정말 힘들어 보이지만 진심을 다해 한발 한발 내딛는 사람도 보였다.
나는 달리면서 퉁퉁 부어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 손을 보며 만약 내가 여기서 포기한다 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에게 많은 마라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에 90살까지 달리기를 하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게 된다면, 나에게는 아직 50년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마라톤도 내가 너무 힘들면 중간에 포기하는 용기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더 많은 달리기를 위해서 지금 포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포기할 마음은 1%도 없었다. 포기해도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이었지만 포기는 할 수 없었다.
해운대 해수욕장을 지나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힘이 얼마나 큰지 느끼고 있었다. 달맞이길 오르막길 직전에 편의점에서 이온음료를 샀다. 날씨가 더워서 편의점의 에어컨 바람이 너무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아직까지 달릴만하고 아픈데도 없었다. 더위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달맞이 길을 쭉 따라 올라왔다. 사실 달맞이 길은 올라가는 길은 경치를 즐길 수 없다. 그래서 그냥 오르막이네 라며 생각하고 올라갔다. 이제 힘든 오르막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달맞이길 오르막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거기서 여자러너분을 한분 만났다. 그분은 울트라 마라톤이 두 번째라고 말씀하셨다. 올해 청남대 울트라마라톤에 갔다 오셨다고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성분이셨는데, 혼자 울트라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역시 경력자답게 묵묵하게 가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번대회에 해운대 블루라인이 공사 중이라서 코스가 조금 바뀌었다. 블루라인으로 가지 못하고 문텐로드를 거쳐 청사포로 가야 하는 가야 하는 길이었다. 문텐로드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라서 걸어서 올라갔다. 문텐로드는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하며 기대를 했었다. 이름부터 달빛처럼 은은하고 예쁜 길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의 문텐로드는 예쁜 길이 아니었다. 이런 길을 가야 한다고? 계속 물음표를 던지게 만드는 길이자, 태어나서 욕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조차 주체 측을 욕하게 만드는 그런 길이었다. 문텐로드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밤에 내린 비로 원래는 아름다은 숲길인 문텐로드는 엄청 미끄러운 진흙길이 되어 있었다. 발을 조금만 내딛여도 쭉쭉 미끄러졌다. "엇!", "악!" "으!" 신음소리가 난무한 가운데 아촌님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다치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었다. 우리는 더 조심해서 발을 내디뎠다. 그냥 걷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기어가는 속도로 온몸에 힘을 주고 균형을 잡으면서 걸어가야 했다. 걸어가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걸어갈 수도 없는 길을 만나니 지금 울트라 마라톤을 가고 있는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문텐로드 숲길은 해가 뜨기 직전이라 정말 컴컴했다. 문텐로드 숲길을 비추고 있는 예쁜 조명이 있었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딱 한 명의 사람을 만났는데 어떤 여자분이 뛰어 오고 있었다. 그분은 쏜살같이 지나가셨지만 우리는 그분에게 배번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동네 주민인데 운동 중인 것인지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원래 그렇게 크게 유용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면서 가는 것이다. 그냥 이런 컴컴하고 미끄러운 길이 언제 끝나나? 이건 혹시 몰래카메라 같은 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사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제는 뛰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그 먼 길을 기어갔다. 언제 가는 이 길도 끝이 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한 2K 정도 되는 길을 30~40분 정도 나 걸려서 겨우 통과했던 것 같다.
문텐로드를 통과하니 두 발로 뛸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행복하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블루라인 데크길이 이어졌다.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다시 천천히 뛰었다.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있었다. 달리며 부산 송정 앞바다의 일출을 기대를 했지만, 날씨가 너무 흐렸다. 구름 때문에 일출이 보이지 않았다. 송정 해수욕장으로 뛰어갔다. 다리가 움직여지면서 뛰어지고 있었다. 손과 발이 붓고, 온몸에서 힘이 없었지만 뛰려고 마음먹으니까 발이 떨어졌다. 뛰어가면서 올드머그라는 커피숍이 보였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곳인데, 하루 50개 한정 샌드위치와 커피세트를 7,500원에 파는 곳이어서 부산 러너들의 성지라고 준옹이님이 말해줬다. 동화 속, 숲 속의 어느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집처럼 보였다. 여름이지만 따뜻한 느낌의 카페를 구경하며 달렸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았던 것 같다. 사장님처럼 보이시는 분이 마당을 정비하고 계셨다. 데크길 위에서는 그런 카페들과 바다들이 어우러져 보이며 새벽을 여는 느낌이 너무나 평안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쯤 되면 내가 너덜너덜 해져서 "난 한걸음도 이제 더 이상 못 걷겠어!"라고 외치거나 너무 힘이 들어서 울면서 뛰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정말 못 달릴 것 같았는데, 달린다고 발을 땅에서 떼니 가볍게 다리가 올라가고, 달려지는 것이 신기했다. 그것도 새벽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뛸수록 더 발이 살짝살짝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달리며 말했다. "나는 여자 장변인 것을 인정해야 되나 봐요." 그때까지는 너무 신나게 달렸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70~80km 지점이었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 행복감과 함께 해돋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새벽이 밝아오고 점점 더 환해지고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이 아침만 잘 버티면 나는 100Km를 완주해 있으리라...
왼:나와 아촌님이 달리고 있다. 중:송정역 앞에서 기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보니 표정이 밝다. 오: 문텐로드에서 넘어졌던아촌님의 바지에 진흙이 묻어 있다.
송정 해수욕장에는 아침 바다 수영을 하고 나온 사람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거나 몸에 물을 뿌리는 것이 보였다. 서로를 보며 인사했다. 서로에게 파이팅을 외쳤다. 송정바닷가에는 겨울에도 그렇게 바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겨울에 이 길을 뛸 때는 겨울 바다 수영하는 사람들이 정말 추워 보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한 여름에 그들을 보면서도 새벽 일찍 나와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대단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송정역이 CP였다. CP가 보이자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CP만 만나면 마치 경주가 끝이난 사람처럼, 행복하고 기분이 좋았다. 날아서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수박화채를 준비해 주셨다. 이미 대변항 반환점을 찍고 오신 분들도 계셨다. 다들 지쳐 보였지만 문텐로드 진흙길을 어떻게 다시 갈지 걱정이 된다는 말을 하였다. 그분들도 많이들 넘어지셨는지 신발부터 양말, 바지까지 진흙이 많이 묻어 있었다. 그 길을 다시 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컴컴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라며 다시 긍정회로를 돌렸다. 지금 걱정해 봐야 스트레스만 받을 뿐이었다. 우리가 갈 때는 해가 비추어 땅이 많이 말라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어서 진흙의 미끄러움이라도 없어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돌아갈 때는 적어도 해가 떠있으니 밝을 것이다. 화채를 먹고 있는데, 벌써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젊어 보이는 남자는 너무 힘들어 보이는 표정으로 들어왔다. CP에 오자마자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바셀린을 찾더니 겨드랑이가 많이 쓸렸는지 바셀린을 바르며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를 질렀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들 너무 사서 고생이다. 나도 대변항 반환점을 찍고 오면 이렇게 지쳐 있을까. 한편으로는 이제 10Km 정도밖에 남지 않은 그 청년이 부럽기도 하고, 아파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꾸역꾸역 뛰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남걱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수박화채는 너무 맛있었다. 콜라도 먹고 보리차도 먹었다. 생각 같아서는 구송정역 CP에 드러누워서 이제 못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걸음이라도 걸어야지 결국은 끝이 난다. 체력과 아픈 곳이 없으면 그냥 달려야 했다. 다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송정을 지나니 기장이 눈앞에 보였다. 기장은 익숙한 곳이어서 그래도 달리면서 기분이 좋았다. 기장을 향해서 달릴 때에는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몇 명씩 보이기 시작했다. 반환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 사람들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에 남은 거리를 뛰어가는 게 힘들겠다며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입에서 파이팅 소리가 나왔다. 서로를 지나가며 큰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용궁사를 지나 아난티 앞 바닷가를 지났다. 사실 힘들다기보다는 너무 경치가 좋아서 우리 셋은 별말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아니 걸으면서 아마 아난티에서 나는 빵냄새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야기는 어쩌면 먹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먹는 이야기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행복해지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경치는 그림처럼 예뻤다. 아난티를 거의 다 지났을 때, 맞은편에서 사진 기사님을 만났다. 기사님은 벌써 철수하고 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조금만 빨리 왔으면 멋진 사진을 찍어줬을 것이라고 말하셨다. 사실 그때는 사진이고 나발이고 이제는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냥 사진처럼, 그림처럼 이 배경에 앉아 있고 싶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아난티 앞 바다 풍경이다. 멀리 배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 진짜 그림 같다.
용궁사와 아난티, 오광대 공원을 잇는 길은 정말 꿈속같이 경치가 좋았다. 뛰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경치가 좋았다. 오광대 공원을 지나자 멀리 대변항이 보였다. 저기 보이는 저기쯤이 반환점이겠다며 우리는 이제 거의 다 와가니 힘내자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마 밝은 태양을 만나게 되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높은 습도와 높은 온도로 몸이 점점 더 지쳐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이 오아시스인 것처럼 그때부터 서로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변항을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반대편에서 달려오시는 분들이 우리에게 이제 힘내라고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이제 3Km만 더 가면 돼요!"라고 말해주셨다. 대변항 반환점은 신기루와 같았다. 뛰어도 뛰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신기루 같았다. 저기까지가 반환점 CP이겠지라고 생각하면 계속해서 더 앞으로 나가야 했다.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향해 뛰면 너무 힘들고 지친다.
"엥? 3Km라고? 우리는 CP까지 300m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3Km라고 말하는 것인지... 나는 사실 그분이 농담하시는 줄 알았다. 송정역 CP에서부터 한참을 달려왔고, 이제 곧 CP를 만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저기 앞에 쯤에 CP가 있어야 하는데, 3Km는 얼마나 먼 거리인가? 평소에 아침에 조깅을 할 때는 20분이면 가고도 남을 거리이지만 지금 이 날씨에 이 지친 몸으로는 세 시간은 더가야 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진짜 거짓말인 줄 알았다. 농담이나 우리를 놀리는 건 줄 알았는데, 정말 진심 어린 3Km가 맞았다. 아무리 가도 가도 CP가 나오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3Km를 좀비처럼 CP만 찾아서 가고 있었다. 대변항 반환점 CP는 정말 구석에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