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을 기다릴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방 그칠 것처럼 조금 오더니 점점 빗방울이 굵어졌다. 출발도 하기 전에 대충 붙인 것 같지만 나름 정성스럽게 한 무릎 테이핑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릎보호를 위해 붙인 건데, 이미 물에 젖어 접착력을 잃어버린 테이프를 손바닥으로 꼭 눌러 붙이는 행동을 하기는 했으나 불안하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출발선은 이미 긍정에너지로 넘치고 있었다. 마라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100K 어떻게 뛰지? 이제 엄청 힘들겠네. 이거 큰일이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이 고생을 사서 하지 않을 것이다. 출발하는 사람들은 모두 축제다. 다들 얼굴에는 희망과 설렘이 가득하다. 그런 사람들 틈에 있는데, 고작 무릎테이핑 떨어진 게 대수이겠는가?
출발을 하고 나서부터는 비가 제법 내렸다. 해도 지고 있었다. 금방 어두 컴컴해졌고, 사람들은 각자 가방에 달린 경광등을 켜고 달렸다. 앞에서 빨간색 불빛(대부분 빨간색 경광등이었다.)들이 반짝반짝했다. 비가 그칠 기미도 없어 계속 내려 걱정이 되었지만 걱정해서 뭘 하겠는가. 모두 같은 환경에서 뛰고 있다. 비가 와도 다들 웃고 있다. 옆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참가비 9만원을 내고 밤에 잠도 못 자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 거리 100K(50K 뛰는 사람들이 더 많긴 했지만)를 달린다고 하며, 비까지 맞으면서도 즐거워 보이다니...
출발하고 조금만 뛰어가면 민락교가 나온다. 나는 마라톤 대회 시작의 흥분감 때문에 가민의 내비게이션을 켜는 것을 깜빡했다. 200~300m 달린 것을 삭제하고 다시 내비게이션의 루트를 검색해서 저장해 놓은 지도를 실행시켰다. 가민 숫자의 노예인데, 실수를 했다. 그러면서 라이브 트랙을 다시 실행시켜 사람들과 공유한다고 초반에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뛰었다. 비가 오고 있고, 사람들이 워낙 많아 속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이것저것을 눌러 실행시켰다. 조금 뛰어가니 민락교가 나왔다. 민락교를 건너 다리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밀려서 거기서는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앞에 비옷을 입은 사람들도 보이고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신발이 젖는 것은 내리는 비 때문이 아니고 고여 있는 웅덩이를 때문이었다. 해는 지고 있었고, 어둑어둑했으므로 앞에 웅덩이는 잘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웅덩이를 피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순식간에 운동화는 젖어 버렸다. 달리면서 조금씩 마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물이 빠질만하면 다시 웅덩이를 밟게 되었다.
" 으악!" "아!!!" 이런 신음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발이 젖을 때마다 나오는 나오는 탄성이었다. 그런데 싫어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데, 소리 지르며 웃고 있다. 풀마라톤처럼 출발과 동시에 숨소리만 들리는 것과는 다르다. 먼저 젖은 사람을 놀리기도 하고, 어차피 다 젖은 거 그냥 물을 팡팡 튀기며 가기도 한다. 이미 어두워져 물 웅덩이가 잘 안보이기도 했다. 물을 피해 다니는 것 그만두고 싶었다. 웅덩이를 최선을 다해 피해도 어차피 똑같이 젖었다. 신발이 젖으면 달리기에 좋지 않다. 짧게 달리면 기분 좋게 달리겠지만, 일단 물에 젖은 신발은 무거워진다. 또 양말까지 젖게 되어 발에 물집이 잘 생길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였다. 신발이 무거운 거야 극복할 수 있지만 초반부터 물집이 생기면 달리기가 힘들어진다. 그렇지만 걱정이 많이 되지 않았다. 이미 울트라 마라토너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부피아들과 만나서 또 한 번 사진도 찍었다. 울트라마라톤은 누구보다 빨리 가야지라고 생각하는 게 없다. 그냥 다들 달리기를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즐기다 보면 100K를 수월하게 가는 것처럼. 앞으로 남은 거리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걱정보다 현재를 즐기면서 뛸 수 있었던 것 같다. 10K 지점에 CP가 있었다. 모든 마라토너들이 그렇듯이 CP만 바라보며 뛰어간다. 10K까지는 거의 평지이며 수영강 고수부지길을 따라 올라간다. 나는 10K까지는 거의 물을 마시지 않았다. 비가 와서 좋은 점은 온도가 많이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CP에 다다랐을 때 일단 물부터 마셨다. 이온음료가 너무 마시고 싶었는데, 이온음료가 없었다. 그 대신 물이 무려 에비앙이다. 편의점가도 가격도 보지 않는 생수인데, 여기서 에비앙을 마시다니... 다음 CP에는 이온음료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시고, 준옹이 님과 아촌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출발하자마자 오르막길이 나왔다. 오르막길은 힘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걷는다고 했다. 나와 아촌님은 오르막길을 보고 너무 신나 하며 걸었다. 준옹이님은 울트라마라톤에서 3위 입상한 수상경력이 있는 선수답게 오르막에서도 천천히 뛰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도 뛰어라고 할까 봐 걱정이 되어 준옹이님에게 힘을 아껴야 되니 걸어가자고 말했다. 준옹님이 아무리 뛰어도 나는 걸어갈 테다.라는 굳은 심정으로 발을 땅에 붙였다. 아촌님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 준옹님은 200~300m 정도의 오르막길을 뛰어가다가 우리와 함께 걷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항상 모든 대회에서 최소한 걷지는 않았던 준옹이님은 걷는 것이 어색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셋이 같이 골인 지점으로 들어가기로 했고, 나는 준옹이님의 페이스를 맞출 수 없으니 준옹이 님이 나의 페이스에 맞춰야 했다.
아무리 오르막길이라도 걸어가는 것은 뛰는 것에 비하면 평안이었다. 숨도 차지 않고, 말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나는 아촌님께 왜 100K를 뛰고 싶었냐고 물어봤다. 아촌님은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듯 5Km도 제대로 뛰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금씩 조금씩 거리가 늘어 하프(21.1Km)를 뛸 수 있게 되었고, 풀코스도 뛰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리를 뛸 수 있게 되면서 성취감을 느꼈고, 100K도 언젠가는 도전해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준옹이님과 내가 100K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에 도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도 나에게는 꿈같은 거리들을 계속 해내왔고, 지금도 해내는 중이었다. 처음 5K를 쉬지 않고 달렸을 때, 10K를 쉬지 않고 달렸을 때 너무 신기해서 SNS에 막 자랑했다. 하프코스를 뛰었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사람들은 풀코스를 달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하프코스를 달리는데도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나는 풀코스는 절대 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지 2년 안에 나는 풀코스를 완주하게 되었다. 풀코스를 처음 달릴 때도 사실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내가 기계같이 움직이고 있었고, 내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은 100K를 달리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나에게 더 큰 목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회동호 둘레길 입구에 CP가 하나 더 있었다. 거기에서는 콜라와 과자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평소에 콜라를 마시지 않는다. 콜라는 체중조절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 나는 그래도 콜라만큼은 마시지 않는다. 정말 마시고 싶을 때는 제로를 선택한다. 그런데 마라톤을 뛸 때는 콜라를 잘 받아먹는다. 사람들이 콜라를 먹으면 힘이 나고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효과를 사실 잘 모르겠으나 콜라를 먹으면 시원하고, 물보다 잘 넘어간다.
콜라가 참 달았다. 갈증도 나는데, 시원하고 달달한 콜라가 얼마나 맛있겠는가. 준옹이 님이 마가렛트와 빅파이를 챙겨주었다. 나는 아끼는 것 없이, 망설일 것 없이 과자 껍데기를 막까서 입에 넣었다. 마가렛트가 이렇게 맛있었나. 이런 게 군대에서 먹는 마가렛트 맛인가?(대학 때 친구가 훈련소에서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마가렛트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났다고 말해줬다.) 단맛과 지방의 고소한 풍미는 그 회동호 초입 엄청난 오르막길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집에 가면 마가렛트를 한 박스 사서 혼자 다 먹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더 행복했다. 돌아갈 때 느낀 거지만 그 오르막길이 진짜 가파르고 힘든 길이었는데, 마가렛트 맛에 정신이 팔려서 어떻게 올라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마가렛트 맛만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회동호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왔다 갔다 하였다. 오르막이 나타나면 신나게 걷고 평지나 내리막에서는 천천히 뛰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오로지 해드랜턴에 불빛 하나만 보고 가야 했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보고 갔다. 임도길도 있었지만 비포장 도로도 있었다. 진흙이 미끄럽기도 하고 흙탕물을 밟을 수도 있어서 바닥만 보면서 계속 갔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산길을 10Km 정도 갔다가 다시 10K 정도 돌아온다. 예상을 할 때는 제일 힘든 길이었지만 지금 기억으로는 여기가 엄청 힘들었다고 기억에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르막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회동호 둘레길을 반정도 올라갔을 때 선두 주자들이 반환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여유롭게 걷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는 동안에 그분들은 그 험한 산길을 계속 뛰어가고 있었다. 반환점을 돌아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면 계속 "파이팅"을 외쳤다. 선두주자들 중에서 마피아들 중 아는 얼굴이 있으면 더 반갑게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회동호 반환점 CP에서 물과 초코바를 먹었다. 나는 에너지젤도 10K마다 하나씩 꼭꼭 챙겨 먹었다. 이 회동호 반환점에서는 꿀을 먹었다. CP에 도착하는 기분은 너무 뿌듯했다. 하나씩 하나씩 성공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이미 몸은 비와 땀으로 절어 있었다. 이때까지도 약하지만 미스트 같은 비들이 가끔씩 내리기도 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는지 아픈지가 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곳은 아픈 곳도 없었고, 기분은 좋았고, 아직 까지 충분히 힘이 많이 남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정말 이온음료가 먹고 싶었다.
반환점을 돌아서 다시 뛰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반복이 시작되었다. 돌아가는 길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항상 기분 탓이라고 생각한다. 거리는 같지만 돌아가는 길은 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결국 회동호를 올라갔다 왔지만 경치 같은 것은 하나도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닥만 보고 달렸다. 회동호를 내려오며 아촌님과 준옹님은 계곡에 신발을 신은채로 발을 담궜다. 더워진 몸도 살짝 담궜다. 아무리 해가 졌고 산이라서 시원했지만 한여름이었고, 습도가 높았다. 몸이 달궈져 있었다. 나는 차마 같이 들어가지 못하고 대리 만족을 느끼며 구경을 했다. 울트라 마라톤에는 물장구를 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쉬어가기도 하고, 물을 보며 발을 담궈 열을 식히기도 하면서 간다. 나는 두 사람을 보고만 있어도 너무 즐겁고 신난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공간을 다 내려와서 이온음료에 목이 말라 있던 우리는 올라올 때 본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이미 편의점 앞에는 많은 러너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음료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양말을 벗어 발을 말리고 있었다. 우리도 포카리스웨트 큰 병과 카페인음료를 하나씩 사서 맞은편에 앉았다. 도로 통제를 도와주시는 자원봉사자와 준용이 님이 아는 사이라서 커피도 한잔 얻어 마셨다. 배가 너무 불렀다.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뛸 때 배가 아팠다. 그렇지만 이온음료는 조절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당기는 맛이었다. 혀뿌리까지 흡수되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물통에 있는 물을 다 버리고 포카리스웨트로 채워 넣었고, 카페인음료와 커피도 마셨다. 아마 이 카페인들 덕분에 달리는 동안 졸리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편의점 앞에 앉아 있는 분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발을 말리는 분을 보며 내발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발을 벗으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았다. 다시 양말을 신는 것도, 신발을 신는 것도, 혹시 내 발에 물집이 많으면 내가 무서워서 뛰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 앉아서 쉬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다시 달릴 수 있었다. 목표는 골인지점이 아니다. 목표는 다음 CP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