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평지를 뛰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 왔다. 회동호를 내려오니 기분이 좋았다. 그 어두운 곳을 뛰다가 펼쳐진 평지와 밝은 가로등빛을 보니 속이 뻥 뚤리는것 같았다. 컴컴한 산길을 뛰는 것도 매력이 있지만(이때가 아니면 언제 그런 산길을 뛰어 보겠는가. 혼자서는 너무 무서워서 엄두조차 못냈을 거다.) 내려와서 뛰면서 역시는 나는 로드를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평지를 뛰면서 1~2Km정도는 너무 신났다. 날아갈 수 있을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너무 많이 걸어서 뛰는 것에 목말라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러너스하이는 오래가지는 않는다. 약간의 행복감이 오는 구간이 지나자 걷고 싶어졌다. 아촌님도 묵묵하게 잘 뛰고 있었지만 힘들어 보였다. 오직 준옹이님만이 힘이 넘쳐서 걷고 싶은 우리를 재촉했다.
"마하!(마피아 하이!)" 준옹이님이 형광색 마피아가 그려진 옷을 입고 마주보고 걸어오고 있는 남녀에게 인사를 했다.
"마하!" 그분들도 인사를 했다. 알고보니 부산마피아에 준옹이님이 아는 분이었다. 우리를 보더니 재빠르게 어깨에 매고 있던 아이스팩 가방에서 쭈쭈바를 꺼내서 하나씩 건내 주었다. 진짜 은인을 만났다. 쭈쭈바로 팔다리를 빠르게 아이싱 할 수 있으며 당분을 보급하여 에너지를 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쭈쭈바를 먹기 위해 걸을 수 있었다. 원래 예상했던 쭈쭈바보다 갑자기 나타난 은인이 떨어뜨리고 간 쭈쭈바가 더 행복한 법이다. 쭈쭈바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도 쭈쭈바와 오늘부터 1일 할 수 있는 맛이다.
쭈쭈바를 먹는 시간은 달콤했지만 금방 지나가버렸다. 다시 걸을 핑계가 없어져 뛰기 시작했다. 중간에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기도 하고, 약간의 오르막만 나와도 걷으려고 했다. 나는 "저기 오르막 앞까지만 뛰어요."라고 말했다. 아주 희망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어 하는 나를 달래는 말이었다. 나는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보이면 같이 걸어가고 싶어졌다. 앞에 여유있게 걸어가는 분들을 보면 나도 여유를 가져도 될것 같다. 하지만 준옹이 님은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더 뛰어서 추월해서 더 멀리멀리 격차를 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사람은 우리 창원마피아의 대표 장변(장거리변대)이다. 어쩌면 내가 믿는 구석(함께 뛰고 있는 준옹이님과 아촌님)이 있었기 때문에 더 걷고 싶었을 수도 있다. 내가 완주를 못할것이라는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사람들과 함께 간다면 나는 완주한다. 그냥 나는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민락교 아래에 있는 CP에서 이온음료를 마셨다. 콜라도 마셨다. 그게 문제 였을 수도 있다. 뛰어서 광안리 쪽으로 가는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해서 아랫배가 아픈것 같기도 해다. 화장실이 가고 싶은 배는 아니였지만 어릴때 너무 많이 뛰면 아픈 배처럼 아팠다. 참고 뛰어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괜찮아지지는 않았다. 주저않고 싶을 정도로 배가 아팠을 때 광안대교가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평소에는 사진찍는 것을 안좋아하지만 사진찍자는 말이 너무나 반갑게 들릴 수 밖에 없다. 땀에 절어 있고, 입술색이 다 날아가고, 얼굴에는 소금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습 따위가 어떻게 사진에 나올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진찍을 때 서서 쉬는게 너무 좋았다. 광안리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대낮과 같은 레온사인과 크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사람들로 거리가 붐비고 있었다. 광안리 전체가 파티를 하는 것 같았다. 광안대교는 야경이 멋지다. 사진을 찍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옆구리가 너무 아팠다. 이건 왜 아픈지 모르겠다. 먹은것도 없는데, 나는 할 수 없이 자리에 멈춰서 조끼에서 비상약을 꺼냈다. 진통제 한알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앞서가던 준옹이님과 아촌님을 부르지 못하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내가 뒤에따라 오지 못해서 준옹이님이 돌아서 오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한참을 나 때문에 걸어갔다. 약간 배아픈게 가라 앉고서야 천천히 뛸 수 있었다. 장거리를 뛸 때 계속 배가 아파왔다. 50K뛸때도 아팠고, 진해LSD훈련을 하러 갔을 때도 그랬다. 어쩌면 뛰기 싫어하는 나의 엄살 병일지도 몰랐다.
부산 이기대 앞 CP까지 천천히 뛰었다. 50K는 거기가 반환이었고, 100K를 달리는 우리는 이기대로 올라가야 했다. 거기에서 떡과 물을 먹었다. 많이 먹고 싶었지만 배가 아픈게 너무 겁이 났다. 다시 뛰어서 가는데, 이기대 오르막 직전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분이 불렀다. 수박화채를 먹고 가라고 했다. 정식 CP는 아니지만 울트라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눔 하시는 분 같았다. 우리는 시간이 많이 없다고 생각해서 수박화채를 들고 가기로 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걸어가며 수박화채를 먹었다. 수박 화채가 너무 맛있었다. 왜 중간에 먹는 음식들은 그렇게 맛있는지 모르겠다. CP에게 배가 아플까봐 수분을 많이 보충을 못해서인지 달달한 수박화채가 꿀떡꿀떡넘어갔다. 수박화채에 들어간 사이다 때문에 시원하고 청량했다.
이기대에 올라가는 길은 정말 오르막길이 많았다.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르막은 '오히려 좋아'다. 걸어갈 수 있다. 사실 걸어갈 때는 셋이서 이야기를 한것 같은데, 기억이 안난다. 나는 오로지 먹은것만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렇다. 울트라 마라톤의 이야기는 먹고 달린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기대정상 반환점에 도착해서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먹고 준옹이님이 챙겨준 파시코를 꺼내서 먹었다. 여기 까지 오면 거의 반을 온것이다. 이제 반만 더 달리면 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큰 오르막 없이 달릴 수 있다. 다시 달려서 내려갔다.
오르막도 좋지만 내리막도 좋다. 큰 힘들이지 않고 뛸 수 있다. 그냥 평평한 평지보다 오르막 내리막 경사가 있는 길이 좋다. 오르막이 힘들면 걸어도 되고, 내리막은 편하게 갈 수 있다. 누구를 이기겠다는 경쟁이 아니라 결승점 까지 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길에서 만난 모든 울트라 마라토너 들에게 동료애를 느꼈다. 나도 힘드니 저분도 힘드시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서로에게 계속 파이팅을 외쳤다. 이기대는 경치가 그렇게 좋다는데,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컴컴한 도로에 가로등 불및만 보고 바닥만 보고 서로에게 힘을 주며 뛰고 있었다.
이기대를 내려가서 다시 광안리를 달렸다. 광안리는 새벽 2시가 된 시간에도 대낮처럼 밝았고, 사람이 북적였고, 쿵짝 거렸다. 돌아갈때는 달릴만 했다. 약간 배가 아프긴 했지만 견딜만 한 정도였다. 걷는것 보다 달리는 것이 더 기분이 좋았다. 천천히라도 달려나가자. 이미 반은 지나왔고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보이겠지 생각했다. 항상 끝은 있으니까 나는 힘들더라도 그냥 버티면 끝까지 갈 수 있다.
뛰다가 걷다가 중간에 다리도 한번씩 풀어주기도 했다. 몸은 땀에 절어 있었고, 힘들었지만 아직까지는 뛸만했다. 아직까지 버틸만 하다는 소리는 점점 더 완주할 가능성이 높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원래 출발지이자 결승점인수영만요트경기장 CP를 향해서 뛰고 있었다. 가는 길 보다 돌아오는 길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요트경기장이 보이자 더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CP를 만나면 너무나 반갑다. 내가 몇초후에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잠깐이라도 쉴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앞에 뛰어가던 사람들도 속도를 높였다. 50K인 사람들이 결승점에 도착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65Km를 달린지점이었다.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50K를 달리고 쉬고 있는 사람들이 크게 부럽지는 않았다. 나는 더 먼 거리를 달려왔고, 이제 35K만 더 달리면 된다. 풀코스도 안남은 거리였다. 이제 35K LSD한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분은 고양되어 있어도 여기에서는 쉬어가야했다. 밥도 먹어야 했다. 우리는 밥을 받았다. 밥은 시락국과 흰 쌀밥, 메추리알과 돼지고기 장조림, 김치, 멸치조림이었다. 밥이 안넘어 갈것 같아서 조금만 받았다. 역시나 밥이 안 씹어졌다. 국을 몇수저 퍼먹고는 밥을 겨우 한수저 떴다. 내 앞에 앉은 아촌님도 밥이 안넘어가는 눈치였다. 밥 맛이 많이 떨어진 러너들을 배려해서 시락국을 맵게 끓인것 같았다. 반찬이 매운건지 국이 매운건지도 잘 모르면서, 밥도 안넘어가지만 억지로 먹었다. 안먹으면 남은 거리를 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겨우 밥을 먹고 나는 약을 먹었다. 그때까지도 배가 조금 아팠다. 진통제 한알과 근육이완제 두알을 먹었다. 이제부터는 밥심과 약발로 가는 거다.
밥을 먹고 나서 나는 내 짐을 맡긴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양말을 갈아 신고 가기로 했다. 양말을 벗는것이 너무 겁이 났다. 엄청난 물집이 기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5K지점부터 물집이 생긴것 처러 불편했었다. 양말을 벗으니 목욕탕에서 7~8시간은 불린것 같은 불어서 쪼글쪼글 하다 못해 하얗게 불어있는 발이 나왔다. 생각보다 물집이 심각하진 않았다. 나는 엄살쟁이인가. 생각했다. 발을 약간 말린다음 발과 발목에 붙어 있는 테이핑을 뜯어내었다. 뽀송뽀송한 양말을 꺼내신으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러닝조끼에서 무겁게 들고다니던 양갱과 필요없는 것들을 빼내었다. 다시 새로 시작하는 느낌으로 뛸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