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by 초코파이
질질질


나는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실내화로 검은색 삼선 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를 신는다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걸을 때 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검은색 삼선 슬리퍼를 실내화로 신을 수 있다는 것은 점점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 검은색 삼선 슬리퍼는 삼디다스로 불렸다. 그때는 전교생이 다 그 검은색 삼디다스를 신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 삼디다스는 규격 같았고, 마치 교복처럼 의무적으로 이것 외에는 선택사항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삼디다스는 문방구에서 팔았고 삼천 원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슬리퍼가 편한 이유는 신고 벗기가 편할 뿐만 아니라 통풍이 잘된다기보다 그냥 뚫려 있으니 발가락도 시원하며, 사이즈가 좀 맞지 않아도 신을 수 있고, 발이 아프지 않기 때문에 중학교에 와서 실내화로 슬리퍼를 신을 수 있다는 것은 신세계였다. 단지 슬리퍼를 신으면 자동적으로 걸음을 질질 끌면서 걷게 되는 것 때문에 선생님은 말하셨지... 신발을 끌고 다니면 복 나간다고. 하지만 슬리퍼를 신으면 자동적으로 발을 질질 끌게 된다. 질질 끌어야 제맛이다. 뭔가 귀찮은 듯, 느긋하게 슬리퍼를 끌면서 걷게 된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이 삼선 슬리퍼가 너무 잘 떨어져서, 테이프로도 고치고, 압정으로 고정도 해보고(정말 위험한 짓이지만), 접착제도 발라보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삼천 원짜리 삼선 슬리퍼를 다시 사는 것이 돈이 아까웠던지, 아니면 사러 가기 귀찮았던지, 아침에 깜빡하고 사지 않았던 게 문제였던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실내화를 끝까지 신어보겠다고 발악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발악을 하면 나중에는 신경이 쓰여서 다른 일을 제쳐두고 실내화 걱정만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미련한 시절을 거쳤던 것이다. 결국 떨어진 슬리퍼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게 되면, 쉬는 시간에도 자기 자리에 본드 붙인 듯이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에게 다가가 발을 부끄럽게 내밀며 슬리퍼 한 짝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짝짝이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이며 매점을 다녀왔던 협동의 정신과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지금 생각해보니 기특한 것 같기도 하다.)


요즘 학생들도 삼선 슬리퍼를 신는다. 슬리퍼에 대한 글을 쓰려고 며칠 동안 학생들 실내화만 쳐다보고 다녔다. 요즘은 삼선 슬리퍼보다 다른 브랜드의 실내화를 훨씬 더 많이 신는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일괄, 규격으로 신고 다니던 삼선 슬리퍼를 요즘은 한 반에 한두 명 정도 볼 수 있을까 말 까다. 슬리퍼들이 상당히 비싸긴 하지만 이 슬리퍼를 실내화로만 신는 것이 아니며, 실외화로 신고 다님으로 당연한 투자일지도 모른다. 운동화가 아예 없는 학생도 만난 적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하 10도 이하로 기온이 떨어져도 슬리퍼를 신고 다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극강의 미니멀리스트였다. 거기에다가 맨발이면 자신의 강함을 어필할 수도 있다.

요즘 학생들은 브랜드 슬리퍼와 더불어 크록스도 많이 신는다. 크록스는 여름 샌들로 많이 신었었는데, 의학드라마에 보면 의사들은 다 크록스를 신고 있어서 크록스는 편해 보이면서도 실용성과 지적인 이미지까지 갖춘 실내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학생들이 신는 크록스는 지비츠를 붙여야 한다. 많이 붙일수록 있어 보인다. 그 지비츠 가격도 만만치 않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기도 할 것 같다. 그 지비츠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붙이기도 하는데, 크록스를 신고 다는 학생들의 신발만 보아도 취향을 알 수 있다.


슬리퍼는 이완의 물건이다. 우리는 편한 자리에 갈 때, 가서 편하고 싶을 때, 내가 편하게 격식을 따지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자리에 갈 때 슬리퍼를 신고 간다. 예를 들자면 동네 슈퍼마켓에 갈 때 말이다. 그래서 슬리퍼는 3천 원 짜리면 족했다. 스포츠 브랜드에서 3만 원짜리 슬리퍼가 나왔을 때 엥? 슬리퍼를 이 가격에 산다고?라고 생각했었다. 슬리퍼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슬리퍼 자체가 편했기 때문에 그 가격에 산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좋은 슬리퍼를 신는다. 나도 학교 실내화로 5만 원이 넘는 가격의 슬리퍼를 신는다. 확실히 3천 원짜리 삼선보다는 구름 위에 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슬리퍼는 다 공평하게 편한 신발이다. 발을 해방시키는 신발이다. 학교에서 모두가 편한 실내화를 신고 발을 해방시켜주고, 편하게 널브러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학교가 모두에게(선생님과 학생 모두) 공평하게 편하고 이완되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keyword
이전 02화#OMR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