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6년 동안 같이 지내고 있는 강박증, 그리고 그로 인해 있을 제약들을 모두 내 여자친구에게 설명해 줬다. 그럼에도 그녀가 선택한 길은 나와 함께하는 것. 이러한 결정에 내심 기분은 좋았지만,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나의 강박증으로 그녀에게 불행이 찾아올 것이라는 걸 알면서 마냥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노릇이었으니깐. 특히 최근에서야 그녀에게서 들은 거지만, 내가 아무리 자세히 설명했어도 그녀는 직접 나와 연애를 해본 것이 아니기에 내 강박증이 어느 정도로 깊게 삶에 박혀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더불어 아직 연애가 서툰 20살이었기에 초반에 나와 연애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특히 그녀는 정말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나와는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매우 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집중해서 본다면,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어두운 면을 믿고 그것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나는 다른 이들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저래?"라고 말하며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불만을 갖기도 하는 반면, 그녀는 언제나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사람을 최대한 편견 없이 보려고 하는 것 같다. 또한 둘이 길을 걷다 가도, 여자친구는 멈춰 서서 예쁜 꽃과 나무를 보며 감탄하고 사진도 찍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 이쁜가?' '어차피 다 똑같은 거 같은데..'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마 세상을 그렇게 봤기에 이런 강박증이 잘 생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강박증이 있기에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도 선후관계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와 500일 가까운 시간을 지내며 나는 다양한 내 강박증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줬다.
내가 그녀와 연애하면서 하지 못하는 것을 한 번 적어보려고 한다. 이렇게 내가 어떤 것에 제약이 있는지 쓰다 보면 생각보다 '아.. 이걸 왜 못하고 있지?'라는 생각도 들고, 또 ‘내가 이런 것들을 보통 두려워하는구나’를 느끼며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기회도 종종 생기는 것 같았다.
1. 여자친구와 성관계 못함
2. 비슷한 성행위를 할 시에는 손을 수시로 닦아야 하고, 옷이나 가방 등 여자친구의 물건에 정액이 묻었는지 체크하고 두려워해야 함.
3. 정액이 묻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항상 입고 있는 옷을 집에 가서 빨아야 함(새로 산 옷이든, 어제 빤 옷이든 관계없이 다 빨아야 함)
4. 모텔, 호텔 등 숙소에 가면 침대에 다른 사람의 정액이 묻어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여자친구가 속옷만 입고 혹은 속옷도 안 입고 누우면 걱정함.
5. 모텔, 호텔과 같은 숙소의 화장실이나 변기에 혹은 공용화장실의 변기에 남자의 정액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여자친구를 화장실을 못 쓰게 하거나 걱정을 많이 함
6. 손이나 옷에 정액이 묻었을 것 같은 날에는 새로운 물건을 구매할 수 없음.
7. 인스타그램을 로그인 한 체로 영상통화, 통화 불가
8.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나 인터넷 사용 중에 여자친구가 전화 걸으면 못 받음.
9. 앱에서 사진 전체 허용 불가 -> 선택 사진만 가능
10. 영상통화 중 여자친구의 중요 신체 부위가 노출되거나 속옷이 노출되면 심각하게 걱정함
11. 핫스팟 연결 시 통화 불가
12. 다른 사람 핫스팟 or 내 핫스팟 빌려주기 금지
13. 공공장소에서 로그인한 계정은 핸드폰이나 내 노트북으로 다시 로그인하는 거 꺼려지고 걱정됨
14. 핸드폰으로 야한 동영상을 보거나 야한 콘텐츠를 보면 여자친구랑 바로 카톡 하거나 전화 불가
휴... 쓰다 보니 참 부끄러운 것도 많고, ‘저게 넌 그렇게 걱정됐어?’ 이런 것도 많은데 웃긴 건 진짜 저런 상황이 되면 빠져나올 구멍도 없는 미로에 갇혀 온갖 패닉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박증"이 참 무서운 병인 것 같다. 내가 읽은 책에서도 강박증을 이렇게 비유했다. '강박증은 긴 미로에 갇힌 것과 같아요. 미로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어떤 길로 미로를 빠져나와야 할지 다 알지만, 정작 미로에 갇힌 사람은 절대 입구를 찾을 수 없죠."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강박증의 증상이 발현될 때 조금만 호흡을 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별일 아닌 일이 많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들키고 싶지 않은 걱정과 불안 때문에 패닉 상태에 다다르니 별 수가 없다. 그러니 이렇게 글을 쓰는 행동이 강박증에는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생각보다 별일 아닌데?’라는 생각과 함께 한 번 이겨내 볼까라는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수많은 강박 행동들과 제약들로 인해 지쳐버린 여자친구는.. 나에게 시간을 갖고 싶다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