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면 설 연휴가 시작된다. 명절은 휴일이자 가족이 함께 즐기는 시간이었으나 공시생이었을 적이나 취준생인 지금이나 고3이었을 적이나 명절은 언제나 피하고 싶은 때 중 하나였다. 나는 늘 친척들의 관심을 달게 받지 못했다. 가족들의 관심은 때론 진심 어린 관심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한다고 했을 무렵,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신 삼촌을 뵙게 되었다. 삼촌은 네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냐면서 공부는 어떻게 해야 되고 당신이 그 시험에서 어떻게 수석을 차지했는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셨다. 솔직히 그중에 도움 되는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하나도 없었다. 약 30년 전의 시험과 현재의 시험은 달라도 많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중요한 시험이 끝나 휴식기에 접어든 친구를 만나 얼마나 명절이 싫은지에 대해 토로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건만 생각해 보면 대기업에 가거나 ‘사’ 자가 붙는 직업을 할 게 아니라면 학벌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대학보다는 과가 중요한 게 아닌가. 재수를 했던 친구와 그런 말을 나눴다.
명절에 어르신들을 만나면 세대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 아빠는 63년생으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끝자락에 위치하신다. 엄마도 마찬가지이시다. 베이비부머 자식들 간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서열이 존재했다. 대부분 가부장적인 집에서 자랐다면 장남이 공부를 했고 그다음은 막내아들의 서열이 높았으며 딸들은 그 뒤를 이었다. 언젠가 출가외인이 될 고모들은 공부를 시켜주지도 않았다. 차남이었던 우리 아빠 역시 학업을 중단하고 바로 일을 시작하셨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눈으로 보면 흔히 MZ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우리는 배가 불렀다. 학업에 끝없는 돈을 투자하고 공부를 열심히 시켜주는데도 행복한 줄 모르는 세대다. 공무원 시험공부가 너무 벅차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나는 아빠 앞에서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을 한 번하고 입을 닫았다. 아빠에게 나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다. 당신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컸으니 당신에게 나는 피는 통했지만 가장 알 수 없는 생물로 읽힌다.
베이비부머 세대/X세대/Y세대/MZ세대라는 기준으로 태어난 연도에 따라 사람들의 특성을 구분하는 이유는 세대마다 전반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 세대에게는 대학졸업장이 부유함과 학식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 자체로 취업하기 충분한 스펙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학벌과 학창 시절 행해지는 모든 교육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12년을 학원에서 생활하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토익학원과 노량진, 신림동을 전전한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본 사람으로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책 제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공부하는 게 힘들다고 말한 적도 없다. 독서실을 다녀와서 녹초가 되어있으면 ‘공부가 도대체 뭐가 힘드냐’는 말을 듣는다. 나는 그 말에 발끈해서 아빠한테 설교한다.
“아빠는 일하는 만큼 돈 받으시잖아요. 저는 매일 무급노동을 하는 거라고요.”
공부가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는 하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한 것보다 얻을 때도 많고 자신이 했던 것보다 잃을 때도 많다. 수험생의 공부는 도박과 비슷하다. 한 번의 시험으로 성공이란 부를 얻어가는 수험생들도 있지만 한 번의 실패로 죄책감이라는 빚을 지고 살아가는 수험생들도 있다. 특히나 공무원 시험공부는 고강도 무급노동이다. 붙는 사람보다 떨어지는 사람이 많으며 사기업 취업준비생과 다르게 공무원 수험생은 그 어떤 지원이나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붙기만 하면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험은 해마다 떨어지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이 글을 읽으며 ‘결국 네가 선택한 일이야. 그렇게 싫으면 하질 말았어야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맞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청년들이 공무원을 택하는 이유 중에는 개인적인 이유들만큼이나 사회적인 이유들도 많이 존재한다. 국가가 고용주 중에서는 가장 청렴하다. 고용과정에서 자신이 뽑히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다. 시험 성적이 부족했다는 이유는 납득할만하다. 그리고 우리 들에게는 공부가 힘들지만 가장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부모의 뜻에 따라 학창 시절 책 앞에만 매달려 있게 된 결과다. 달리 어떤 것을 택할 방도가 없을 때 우리는 가장 익숙한 것을 찾아간다.
다가오는 설날이 두려워 조금 찡찡거리고 말았다. 곁에 수험생이 있다면 ‘공부하는 거 많이 힘들지’라고만 말해줘도 충분히 고마워할 것이다. 시험공부는 절대 쉽지 않다. 어렵고 힘들다. 시험공부란 쏟아부은 것만큼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무급노동 중 하나라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