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는 은퇴가 없어

by 김룰루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 95세. 지팡이를 짚어야 걸으실 수 있으신 것 빼고는, 최근까지도 정정하셨다. 폐에 물이 차서 일주일 전 입원하셨다고는 들었지만, 분명 큰 병은 아니라고 했었다. 의식을 잃기 3분 전까지도 이모와 퇴원하면 뭐 먹을지 즐거운 상상을 하셨다고 한다. 물 한 모금 축이고서 잠자리에 드셨는데, 그 길로 곧장 떠나가셨다. 그녀를 떠나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관 속에서 눈감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이 작은 체구에서 9남매가 태어났고, 또 그 자식들이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니. 새삼 할머니의 인생 굴곡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였다. 갑작스러운 부고를 겪으니 나도 한동안은 마음 한구석에 그늘이 졌다. 즐겁게 웃다가도 찝찝함이 들었다. 깊이 잠들지 못하고 눈이 떠지곤 했다. 한 다리 건너인 나도 이런데, 우리 엄마는 어땠을까. 지금도 종종 '엄마'를 외치면서 잠에서 깬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엄마도 엄마가 아직 필요한가 보다.


학생들에게 내어준 시 창작 숙제를 검사하는 날이었다. 무려 4분이 어머니에 대해서 시를 썼다. 굴곡진 인생, 추억, 미안함 그리고 그리움을 운율에 실어서 왔다. 그날이 마침 우리 할머니의 49재였다. 자연스럽게 수업시간에 할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가족이야기만 한 게 없다. 학생들은 남일 같지 않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아이고', '이런 어쩌나'하는 탄성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는 다들 할머니가 부럽다고 하셨다. 오랫동안 자식들 걱정 안 시키고 건강히 지내시다가, 편히 눈감으셨으니 그것도 본인 복이자 자식 복이라는 거다. 요양원에 가지 않으신 점, 투병기간이 없다시피 한 점, 심지어 자식들 상 치를 때 고생 안 시키려고 밤 11시에 돌아가신 것 마저도. 차마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아마도 이때 본인들이 숨을 거두는 날을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우리 학생 한 분이 나의 형제관계를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장남이고, 밑으로 여동생이 한 명 있다고 했더니 학생분은 '저런... 나중에 큰 일 치르실 때 혼자 다 감당하셔야겠네.' 라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녀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아마 그녀는 평소에 그런 걱정을 했던 것 같다. 본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머리가 긴 자식들의 표정을. 아직도 우리 엄마들은 집안 큰 일은 남자들의 몫이어야 마음이 놓이나 보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학생분이 공감을 하면서 '나는 여자지만, 집안 대소사 내 손으로 많이 치렀어요. 가끔은 남편 몰래 식구들 도와주기도 하고.'라고 덧붙이셨다. 마음이 편치 않으신가 보다. 본인들이 그렇게 힘들게 겪었던 길을 자식들도 언젠가 한 번은 가야 한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들 때문에 말이다.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면서부터, 부모님이 조금씩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사회적 경력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우리 엄마와 아빠는 나이가 들어가셨다. 생활비를 이제 드려야 하나? 건강검진은? 저번에 알려드린 키오스크 사용법은 안 까먹었으려나? 정신 차려보니 부모와 자식관계가 역전되었다.


아래는 성인용 문해교육 과정에서 쓰이는 중등 국어 교재다. 글자 크기를 제외하고는 여태껏 야학에서 쓰는 교재와 일반 교과서의 차이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주제를 보고는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 십 대 아이들과 성인들은 삶의 시선 자체가 다르지. 토론 주제가 '손주 양육을 어디까지 해 줘야 할까?'가 등장한다. 교육부에서 만든 교재에 이런 주제가 등장할 정도로 손주 케어는 조부모들의 공통된 관심사다. 부모의 노릇은 자녀가 독립하면 어느 정도 끝나는 줄 알았는데, 어른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우리 집만 해도 냉장고를 열면 부모님이 담아준 김치가 있다. 결혼을 할 때, 자녀가 생길 때도 부모의 역할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녀 관계가 뒤바뀐다는 건 그냥 내 생각이고, 부모님에게 우리는 여전히 돌봐주어야 할 아기들이다.



자식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다가, 점잖게 삶을 마감하는 것. 자식들 몸고생, 마음앓이 안 시키는 것. 엄마들의 장래희망이다. 경제적 자유를 이뤄서 빨리 은퇴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족적 자유는 없나 보다. 스스로 원하지도 않는 것 같고. 엄마는 은퇴가 없다.

keyword
이전 09화인정받지 못하는 노고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