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공부를 대신해 시작한 중국어 공부가 나중에는 나의 직업까지 바꾸어 놓았다. 한자를 공부할 생각으로 서점에 갔다 차라리 시작할 거면 외국어를 배워 보자며 중국어 교재를 덜컥 사가지고 와버렸다. 이렇게 중국어를 취미로 시작하다 보니 목적을 가지고 배우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회사에도 중국 주재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밀어주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이들은 뜨거운 존재였고 나는 반대로 차가운 존재였다. 가족과 해외 생활을 하는 것과 자식을 외국에서 공부시키는 것에 모두가 열광했지만 나는 이것까지도 차갑게 대했다. 그런데 주재원 선발이 끝나고 확정만 남긴 상황에서 이변이 생기면서 지원도 하지 않은 내가 가는 걸로 바뀌어 버렸다. 반전은 영화나 TV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중국과의 관계가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내가 중국행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뜨거웠다. 아마 이때가 중국과 가까워지면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로 기억된다.
내가 상하이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몇 개월이 지나 중국 본사가 있는 베이징에 가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중국안에서도 다른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하이가 뜨겁다면 베이징은 차갑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커서 둘이 서로 다른 행성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 중국 교수가 강연에서 중국을 사각형에 비유했는데 나는 이것도 베이징에 도착하고 나서 알 수가 있었다. 베이징은 중심인 고궁부터 주변을 감싸고 있는 도로까지 모두 사각형이었다. 그런데 크기가 달라 보였다. 베이징이 상하이보다 큰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상하이에서는 큰 것이 비어 보이지 않았지만 베이징에서는 이것이 비어 보였다. 큰 사각형은 무엇을 갖다 놓아도 채워지지 않는 듯했다. 여기에 빼곡히 심어 놓은 포플러 나무가 자라고 있었지만 이것 또한 채워지지 않는 듯했다.
이것 또한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봄날 출장차 방문한 베이징은 도시 주변에 넓게 자란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하얀 솜털이 날리면서 겨울을 연상시킬 정도로 거리를 하얗게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미루나무로도 불리는 포플러 나무로 베이징 시가 대기 오염을 줄이기 위해 대대적으로 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다. 봄이 되면 스모그로 고통받는 것 이상으로 포플러 꽃가루와 새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난데없는 꽃가루 예보로 외출을 포기하거나 꽃가루 알러지로 병원 신세를 지는 등 불편함이 가중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에 인간이 고통받게 되면서 결국 나무들이 억울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 20만 그루로 예상되는 포플러 나무들에 벌목과 가지치기가 가해지고 있으며 나무들에는 꽃가루 억제제가 주입되고 꽃가루가 없는 수컷 가지들로 바꾸어 접목되고 있다고 한다. 빨리 자라고 이산화탄소의 흡수가 높다는 장점을 보고 가져다 놓은 것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28만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꽃가루를 함께 감내하게 되면서 불편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뜨거운 존재가 차가운 존재가 되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이것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얼마전 접한 한 뉴스의 헤드라인을 보고 가슴을 세게 얻어 맞았다. 도시의 가로수가 잘리면서 새 둥지가 추락해 아기새가 죽었다는 신문 기사였다. 이것은 내 눈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올해초 겨울이 끝나갈 무렵 우리 아파트에도 똑 같은 일이 있었다. 2층에 사는 우리는 거실 앞에 있는 커다란 정원수들이 잘려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정원 조경수를 정돈하겠다는 안내 방송은 있었지만 결과는 예상과 많이 달랐다. 3층 높이로 자란 나무들의 가지가 일말없이 잘려 나갈만큼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모든 것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나무 위 여러 개 있던 둥지들까지 잘려 나가면서 이곳에 있던 새들까지도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이 일에 대해 여럿이 항의를 했지만 관리와 편리가 만들어 낸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서울 보라매 공원에 있는 30미터 크기의 거목인 포플러 나무들도 같은 방식으로 잘려졌다. 이것은 20여명의 주민이 모여 만든 ‘보초맘’이 공원의 생태계를 관리하고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주변의 개발에 의해 나무들이 위험물 취급을 받게 되면서 인간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에 데려오고 사라진다는 것이 아쉽고 씁쓸하기만 하다. 민중(Populus)이라는 이름을 가진 포플러 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뻗지 않을 정도로 다른 나무들의 성장에도 방해하지 않고 자란다고 한다. 그런데도 민중인 우리는 그들에게 그만큼의 공간도 허락하거나 내주지 못하는 것 같다. 포플러 나무로 주변을 가득 채웠던 보라매 공원에는 이젠 네 그루만 남았고 이 마저도 자기 키의 1/3의 머리가 잘리고 이젠 자기 자리를 비워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필요로 키웠던 나무들이 기피종이 되면서 이젠 나무가 쓰러져 우리를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현실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볼멘 소리여도 좋겠다. 공통의 이익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만큼 다른 소리도 많아지면 좋겠다. 잘렸던 나무가 여름이 되어 자리를 잡고 새들이 찾아와 둥지를 짓는 것을 그냥 자연이 감당하는 것으로 대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공간을 주고 우리가 동등하게 주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사회성을 가지고 소통하고 공존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나무의 방식으로 소통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차가워진 관계를 다시 뜨겁게 되돌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녹는점을 높여야 다시 뜨거워질 수 있는 것이다. 가깝게 그리고 뜨겁게 대하던 것들을 계속 그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임이 분명하다. 분명 뜨거운 것에는 짙고 그리운 기억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채울 수 없는 것은 사각만이 아니다. 이기심과 함께 잃어버린 것들 또한 다시 채울 수가 없을 것이다.
#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에서 살고 싶다면 질문에 순서를 바꾸는 것으로 답을 찾으면 좋을 것 같다. 어떤 집을 짓느냐는 질문에 앞서 집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싶은지를 묻는 것으로 질문을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땅을 파거나 나무를 자르는 것으로 일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 근처인 숲 속 습지에는 집이 다르게 지어졌다. 이 집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예쁘지 않았다. 정원도 없으며 집도 수직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질문의 순서를 바꾸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집이 달라진 것이다. 습지의 자연을 고려해 섬의 모양으로 옥상이 있게 수직으로 지어졌다. 나무를 베어 내지 않았고 주변의 자연석을 가져다 쌓아 소박하게 지었다. 그런데도 이 집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항상 나무가 집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창과 계단은 물론 옥상에서 넓은 대자연으로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직인 집 모양이 자연과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사각형이 만들어 내는 이기심이 싫다면 수직으로 눈높이를 높여 보면 좋을 것 같다. @파라과이 미리키나 하우스by 호세 쿠빌라 2021 (Mirikina House by José Cubilla)
# 집이 다듬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집은 세대를 거치면서 증축을 하고 구성원이 바뀌면서 집은 움푹하게 나이가 들어간다. 어렸던 소녀가 중년의 어머니가 될 만큼 집 또한 많은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리고 가끔은 나무가 그 기억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나무가 집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데는 나무가 위로는 무성한 잎들을 내주고 그 밑은 가족과 이웃에게 내어주기 때문이다. 나무를 집의 중심에 놓는 것 이것은 다른 의미로 나무에게 집의 중심을 양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보와 배려도 시간이 쌓여야 생기는 것 같다. 이것이 집이 다듬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트리 하우스는 나무에게 집의 중심을 양보하면서 침실과 가족의 공간까지 비켜 배치하였다. 이렇게 양보와 배려가 있는 공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함께 짙어질 것 같다. @영국 트리 하우스 by 6a 아카텍처 2013 (Tree House by 6a Architects)
> 참고 자료: 미세먼지 줄이려고 나무 잔뜩 심었다가 ‘꽃가루 폭탄’ 맞고 있는 중국의 근황 (더 에포크 타임즈, ‘21/04/28). ‘50살 가로수’ 머리 8m 싹둑…. ‘새 둥지 추락해 새끼도 죽어’ (한겨레, ‘22/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