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새로운 시작.
이틀 전, 마지막 면회를 하고 왔다. 아버지가 2년 동안 치료를 받고 있던 복주병원에서의 마지막 면회였다. 아버지는 더 이상 <회복기 재활병원>에 있을 수 없다. 4월 말을 기준으로 발병일이 2년을 지나기 때문.
발병 2년이 지난 환자들은 회복이 더디거나 회복불능 상태가 확률적으로 높기 때문에 나라에서 더 이상 <회복기 재활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없도록 정해두었다. 치료를 하면 회복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환자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양보하라는 뜻이다. 뇌졸중 치료는 6개월 안에 얼마나 집중 치료를 하느냐에 따라 환자가 일상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지가 판명된다고 한다.
엠블런스에 누워 이동하면서도 눈만 껌뻑거리던 아버지는 안동복주병원으로 가서 말을 하고, 손발을 움직이고, 휠체어를 타고, 걸음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여든이 넘은 아버지에게 2년은 긴 시간이다. 본인은 그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2년의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서울과 안동을 수도 없이 왕복했다. 단 한 번도 귀찮은 적이 없다. 더 자주 가지 못하는 게 맘에 걸렸다. 그건 엄마와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동생 역시 회사 휴가의 절반 이상을 아버지 병원 관련 일로 썼다.
복주병원에 올 때만 해도 아버지는 콧줄로 식사를 대신했다. 한쪽 코에 지름이 커다란 플라스틱 호스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숨이 불규칙했다. 가뜩이나 정상 컨디션이 아닌데 한쪽 코가 막혀 있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담당의 선생님이 위에 직접 관을 삽입하는 '경피적 위조루술'을 권유했을 때,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엄마와 동생에게 시술을 설명하고 바로 결정했다.
뱃줄을 하면 확실히 콧줄보다 환자가 편하다. 대신 보호자가 더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 뱃줄을 주기적으로 갈아줘야 하는데 내시경이 가능한 병원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5개월에 한 번 정도 병원에 모셔가서 뱃줄을 교환하고 와야 한다. 담당의 선생님은 환자의 몸에 구멍을 뚫는다는 게 부담스러워서 많은 보호자들이 뱃줄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다. 나는 콧줄을 떼고 뱃줄을 한 결정에 만족한다.
콧줄을 떼니 아버지의 컨디션이 좀 더 살아났다. 2년이 지난 지금은 하루의 두 끼를 미음으로 식사를 한다. 간병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직접 떠먹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안동은 먼 거리다. 차로는 세 시간 반. 한 시간 면회하기 위해 하루를 온전히 다 쓴다. 면회를 가는 동안은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설레고 면회를 마치고 오는 동안은 생각처럼 회복되지 않는 아버지 생각에 내내 마음이 무겁다. 기적을 바라고 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적은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지금의 아버지를 인정하는 데에 1년 이상이 걸렸다. 아버지는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걸 인정하고 나서야 장애 신청을 했다.
안동복주병원에서의 시간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2년의 시간 동안 나는 병원 문제로 고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담당의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간병 선생님 모두가 나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가끔씩 영상통화를 요청하면 기꺼이 영상통화를 연결해 주었고 단 한 번도 귀찮은 표현을 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전두엽이 많이 손상된 환자다. 섬망이 있고 긴 대화가 어렵다. 쓸데없는 말을 자주 한다. 간호사 선생님들이나 간병 선생님들에게 때때로 짖꿋은 농담도 한다. 내가 옆에 있어도 그러니 없을 땐 더 심할 듯하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아버지를 환자로 대한다. 환자니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절로 생긴다.
마지막 면회는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했다. 안동에 계시는 처가 어르신들이 아버지가 부평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 하셨다. 사실 나는 처가 어른들이 아버지를 문병하는 게 그리 반갑진 않다. 우선 환자복을 입고 초라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가 싫고 충동 제어가 쉽지 않은 아버지가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전날, 아버지를 면회하며 얘기했다.
-아버지. 내일 장인어른, 장모님 모시고 올 거야. 아버지 가시기 전에 인사하고 싶으시다네. 그러니깐 오시면 인사 잘해요.
아버지는 방금 만났던 내가 화장실을 다녀오면 처음 본 사람처럼 얘기하곤 한다. 다음날의 일어날 일들을 기억할 리가 없다. 그래도 얘기한 것이다. 기도를 하듯이....
마지막 면회를 하는 날,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같이 온다고 하더니, 왜 혼자 왔어?
어제 내가 한 말을 기억한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아빠. 기억나? 맞아. 어르신들하고 같이 온다고 했어. 그걸 기억해?
-그래. 왜 혼자 왔어?
-아빠. 식사 중이라 기다리고 계셔. 어서 마저 먹자고요. 다 먹고 양치한 후에 들어오시라고 할게.
처가 어르신들을 만난 아버지는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고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렸다.
-비도 오는데 오실 때 힘드실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먼 걸음 하셨습니다.
아버지였다. 어려운 사람에게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다운 모습의 아버지였다. 2년 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아버지였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돼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나의 아버지였다.
부평에 있는 요양재활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기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한 시름은 놓았다. 동시에 걱정이 앞선다. 긍정적인 분위기의 복주병원에 있다가 새로운 병원에 가서 적응을 잘할지....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 든 적이 있었을까? 친구들을 잘 사귀고 학교를 잘 다니던 나를 전학시켰을 때 그런 우려의 마음이 들었을까? 부자 사이의 감정이 그렇게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