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너머로 배운 엄마의 손맛 -비빔국수
선물 받은 사과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먹지 못해 물러버렸다. 먹을 수야 있겠지만 이미 최고의 시기를 지나 맛이 다 빠져버린 사과다. 그만큼 맛없는 것도 없다. 그냥 버리기엔 선물을 준 사람이 떠올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가 만들던 비빔양념장이 떠올랐다.
엄마는 시장에서 파는 ‘파과’를 싸게 사 오곤 했다.
한쪽이 골거나 사람들이 많이 만져 무른 사과나 배를 엄마의 장바구니에서 볼 때마다 '이 걸 어떻게 먹냐고, 과일은 제 값을 주고 사 먹어야 한다'라고 엄마에게 핀잔을 줬다. 마치 엄마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엄마가 사 온 ‘파과’는 엄마의 장바구니에서 금세 사라졌다. 양념장을 만든 것이다. 엄마는 비빔국수를 무쳐줄 때마다 자기가 ‘파과’를 먹는 게 아니라고 증명하듯 말했다.
-이거 다 과일 갈아서 만든 거야. 조미료 하나도 안들어 갔어.
나는 그 맛 있는 비빔국수를 먹으면서 이미 엄마 장바구니에 있던 파과는 잊었다. 그저 맛있을 뿐이다.
엄마의 얘기는 건성으로 듣고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상한 부분은 도려내고 부엌 한 구석에서 과일을 먹는 엄마를 상상한다. 맨날 좋은 건 아버지와 나에게 주고 자기는 성치 않은 부분을 먹는 사람이었으니까.
엄마는 늘 그런 식이었다. 따뜻한 밥을 직접 하고도 찬밥을 먹는 사람. 엄마가 찬밥을 먹느라 따뜻한 밥은 또 찬밥이 되고, 또 엄마는 찬밥을 먹고.
'찬밥'이 뭐라고. 딱 한 번만 버리면 그 지겨운 사이클을 끊어낼 수 있을 텐데, 지겨울 정도로 말해도 엄마는 듣지 않는다. 자꾸 말하면 싸움이 되니까 어느 순간부터 잔소리를 멈췄다. 엄마가 찬밥을 먹는다 하면 엄마가 무른 과일을 먹는다 하면 그냥 그대로 놔둔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엄마는 어떻게 생각할까?
무른 사과를 갈았다. 갈아 놓고 나니 갈색에 가깝다. 오래된 것이라 그런지 갈변도 빠른가 보다. 냉장고에 있던 탄탄한 배를 깎아 반은 아내와 나눠 먹고 반은 사과를 갈았던 믹서기에 다시 갈았다. 싱싱한 배는 제 색을 그대로 띠고 있다. 단단한 흰색이다.
이번엔 양파다. 햇양파가 나오는 시기. 햇양파는 양파 특유의 아린 맛이 덜하기 때문에 아삭하고 은은한 단맛이 좋다. 햇양파가 나오는 시기엔 생으로 많이 먹어둬야 한다. 배즙에 양파를 갈았더니 부드러운 흰색으로 변했다.
고추장, 식초, 설탕, 고춧가루, 매실액, 후추, 마늘을 넣고 섞다가 사과, 배, 양파 간 것을 함께 넣어 휘저어준다. 여기서 포인트는 그 점도가 초장보다 조금 더 묽어야 한다는 것!
이 비빔장은 만능이다. 비빔냉면도 막국수도 물회도 가능하다.
냉장고에 숙성을 해두었다가 더위가 시작될 즈음, 엄마한테 가서 비빔국수를 만들어 주고 와야겠다.
매번 엄마가 만들어 주었으니 이제부턴 내 차례. 이제 얻어먹은 것도 조금씩 갚아 나갈 때가 됐다.
잘 비벼진 국수를 한 입 먹고서는 엄마가 물어볼 것 같다.
-양념장에 과일 넣는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알뜰살뜰한 울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