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요리의 기쁨

20. 장아찌가 짠 이유 - 무짠지 무침

by 조명찬

아버지는 절임 반찬을 좋아했다. 그래서 다양한 절임 반찬이 냉장고에 늘 준비되어 있었는데 입맛이 없는 여름에는 겨울에 담가두었던 ‘무짠지’가 빠지지 않고 상에 올랐다.



어디 무짠지뿐이랴! 아삭아삭하고 새콤한 매실장아찌, 쿰쿰하게 삭은 울외장아찌도 계절에 따라 반찬으로 먹었다. ‘나나스케’라고도 불리는 울외장아찌는 가정에서 흔하게 먹던 반찬은 아니다. 술을 담고 남은 지게미에 울외를 삭혀 만드는데 처음 먹은 사람들은 그 특유의 쿰쿰한 냄새에 기겁을 한다.


어릴 적 사촌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아버지는 장난 삼아 억지로 울외장아찌를 하나씩 먹이곤 했다. 장아찌를 뱉어버리면 혼날 것 같고 먹기에는 그 맛이 너무 역해 곤란해하는 사촌들의 얼굴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아버지와 함께 눈을 맞추며 큭큭대곤 했다. 그때의 난 이미 여러 가지의 장아찌에 단련되어 있어 웬만한 절임류의 반찬은 꿀떡꿀떡 잘 먹을 때라 푹 익은 나나스케도 문제 없었다.


가장 흔하게 먹는 무짠지는 국이나 찌개가 있는 밥상에서는 존재감이 미약하지만 속이 불편해 간편하게 먹고 싶을 때 누룽지와 함께 먹으면 단번에 밥상의 주연을 꿰찬다. 뜨끈뜨끈하게 끓여진 누룽지에 차갑고 매콤하고 짜고 아삭한 무짠지를 곁들일 때야 말로 장아찌 맛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별 거 아닌 게 결국 별 거'라는 인생의 진리는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다.


엄마는 요즘 만날 때마다 무짠지를 열심히 가져다준다. 아버지를 위해 담가두었던 무짠지가 주인을 잃었기 때문.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는 올여름, 무짠지를 먹을 수 없다. 사실은 올여름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올 겨울에 엄마는 또 무짠지를 준비해 둘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엄마는 아버지가 다시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듯 무짠지를 담글 것이다. 나는 울외장아찌를 예전 방식으로 만드는 곳을 즐겨찾기 해두었다.


내년 여름에는 엄마가 낸 무짠지와 내가 찾아낸 울외장아찌를 함께 상에 올려두고 가족이 함께 먹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벌써부터 짠하다.





무짠지 무침


1. 잘 익은 무짠지를 채를 썰어 찬물에 담가 둔다. (약 30분 정도)

2. 물이 담가두었던 짠지를 꼭 짜서 물기를 뺀다.

3. 다진마늘, 고춧가루, 참기름, 통깨, 쪽파를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4. 뜨끈 뜨끈한 누룽지나 금방 한 흰쌀밥을 준비한다.

5. 조미김과 함께 무짠지 무침을 먹는다.


*무짠지를 먹을 땐 반찬이 많으면 안 된다. 한번쯤은 무짠지를 중심으로 먹어보자.

슈퍼스타는 없지만 연기를 오래해서 농익은 조연이 주연인 영화!

가끔은 그런 영화가 큰 울림을 주듯, 소박하고 간단한 식사가 때론 큰 만족을 준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19화요리의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