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영화에 나오는 대사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사가 하나 있다. 영화 초반부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신의 동네를 여행하라고 과제를 내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자신의 동네를 여행해라." 그 이후로 동네를 여행하겠다는 마음으로 동네를 유심히 봤었다.
우리 동네는 언덕으로 빌라촌과 아파트가 섞여있는 구심 도시였는데 제법 볼거리가 많았다. 다양하게 생긴 빌라와 개인 주택집, 고불고불 이어진 골목길, 길 가면서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 전봇대 밑에 무더기로 버려져 있는 쓰레기, 키보다 훨씬 높은 담벼락, 어린아이 하나 없는 놀이터 그리고 4차선 널찍한 도로 옆 인도로 우거진 나무와 풀위로 가지런히 깔려있는 타일까지 다 새롭게 느껴졌다. 늘 지나온 길인데 어찌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신기했다. 이제 막 도시에 상경한 시골쥐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돌아다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평일에는 회사 건물 안에서만 있으니깐 출퇴근 길, 운동하러 가는 길 말고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평일에는 없다. 그 시간 말고 바깥의 세상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다 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그런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날 때면 이때라도 세상을 온몸으로 느껴야겠다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소중하게 걷곤 한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퇴근길에 갑자기 역에서 집까지 걸어가고 싶었다. 여름이 한풀 꺾인 날씨는 제법 견딜만했고 1km 남짓한 거리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중간에 행정복지센터가 보였다. 행정복지센터 정문 쪽 앞 야외 복도에 코팅된 A4용지에 적힌 시들이 대략 20 작품정도 진열돼 있었다. 시인들은 초등학교 2~3학년, 시 뒤로 손수 그린 그림까지 이쁘게 그려져 있었다. 집에 가서 급하게 해야 할 일도 딱히 없으니 대낮의 더위 따위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멈춰 서서 차분히 시들을 읽기 시작했다.
투박하면서도 순수한 그림들과 그 나이 때만이 할 수 있는 생각들이 담겨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고 내 과거를 헤집어 봤지만 머릿속에 흐릿한 기억들만 스쳐 지나갔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저학년 때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때인지 아닌지 모를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도 그때의 마음이었는지, 지금의 감정으로 덧붙인 마음인 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어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러던 중 시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햇살 2학년 조하은
우리 집 창문에 눈부신 햇살이
환하게 들어와요.
집안이 밝아져 따뜻해지면
베트남 같아요.
햇살이 금세
커다란 아파트 뒤로 숨어버리면
우리 집 어두워져요.
어두운 터널 같아요.
햇살이 우리 집에 계속 머물러
내 마음 따뜻해졌음 좋겠어요.
이 시가 마음에 들었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동향으로 되어있는 우리 집도 오전에만 햇살이 들어오기 때문에 나와 같은 환경이라서 공감이 갔다. 햇살이 집안에 닿는 느낌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두 번째는 시에서 비유적으로 표현한 베트남이 머릿속에 상세히 그려졌다. 두 달 전,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의 작렬한 열기 속에서 보낸 날들을 떠올랐다. 그때의 더위가 지금 내게 따뜻함으로 느껴진다. 세 번째는 집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해지고 싶다는 그 솔직한 문장이 아이의 감정 표현이 잘 드러내는 것 같아서 마음속에 와닿았다.
솔직함… 뭐랄까. 사람은 나이가 들 수록 솔직함을 점점 마음속에 감추고 사는 것 같다. 머릿속에 차오르는 생각들이 자연스레 많아지고, 이것저것 따질 것이 많아지다 보면 입을 점점 조심하게 된다. 그것들을 계속 신경 쓰고 살다 보면 정직하게 말을 내뱉지 않거나 부끄럽고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삼키기도 한다. 그것이 나는 세월이 주는 고질병 같아서 싫다. 이렇게 시 위로 쓰인 어린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표현들이 내 마음을 녹이는 것은 다 솔직함 때문이다.
나는 꾸밈없이 쓰인 문장들이 가득힌 20편의 시를 다 읽었다. 다 읽고 나자 내 마음속에 바람만 쓸데없이 지나다니는 넓은 공간에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5시의 태양이 비추는 익숙한 동네 위로 행복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