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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희 시인 Aug 17. 2024

나의 이름은... 그리고 詩 아버지께

은혜 恩에 빛날 熙를 쓰는 은희, 凶名이라도 나는 좋아!

어느 귀부인이 꿈을 꾸었지.


'맑은 시내가 흐르는 푸른 벌판에 커다란 월계수 나무 아래에서 사내아이를 해산한 거야. 그 사내아이는 월계수 열매와 맑은 시냇물만 먹고서 바로 자라나 목동이 되었어. 그러고는 그 월계수 나무의 잎사귀를 따려고 애를 쓰다가 넘어진 거야. 그런데 넘어졌다고 생각한 그가 다시 일어섰을 때는 사람이 아니라 공작이 되어 있었어.'


너무 놀라 귀부인은 잠에서 깼지.

이 꿈을 꾸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사내아이를 낳았어.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꿈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합의한 후에 그 사내아이의 이름을 "단테"라고 지어주었지.
그래, 바로 이 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의 어머니가 꾼 태몽이야.




난 내 이름이 참 좋아.
작명소에 맡기지도 않은 아빠가 어쩌면 즉흥적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낳고 얼마 안 되어서 직접  지어주신 '은혜''빛날'를 쓰는 은희, 내가 태어났던 시절에 여자아이 이름에 들어가 '희'는 대부분 지금은 '여자姬'라고 부르지만, 그땐 '계집姬'라고 불렀던 그 글자를 주로 썼었지. 특히나 여자아이에게  '빛날熙'를 쓰는 일은 더 드물었을 테고...

하지만 스물아홉 내 아빠는 당신의  푸른 날의 꿈을 닮은 그 시절의 추억들을 가득 담아 나의 이름에 빛날熙를 쓰셨지.
내 딸 그렇게 빛났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내 아빠도 당신의 둘째 딸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비록 아들이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남자들 이름에만 쓰던 빛날熙를 쓰셨겠지.

 
어릴 때 유독 아빠는 딸 넷 중에 나를 예뻐하셨어. 특히 일곱 살 무렵에는 옛날 기와지붕에 양철 처마로 지어진 반한옥집 마당에서 나를 높이높이 안아서 들어 올리시다가 내 이마가 찢어지는 일도 있었으니까.

더 어릴 때는 아빠의 자전거 뒤에 보조의자를 달고 어딘가를 가던 기억도 아주 어렴풋하게 남아있지.  
아빠와의 추억은 이것 말고도 너무 많아서 언젠가 다시 이야기하는 날이 올 것 같아.

아빠는 고교시절 문학소년이었다 했지.

아빠의 손때가 묻은 수학참고서의 갈피 속에서 누군가에게 쓴 편지처럼 적힌 詩와 나뭇잎을 나는 아주 어릴 때 본 적이 있었어.

옛날집 낡은 그 서방집 책장에 가득 꽂혀있던 그 책들 속에서...
노란 갱지의 오래 묵은 향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아빠의 이루지 못 한 간절한 꿈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은혜 恩에, 빛날 熙를 쓰는 나의 이름 李恩熙가 너무 좋아.




사실 내 이름은 성명학적으로는 흉명(凶名)이었어. 내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우리 부부도 자식의 이름을 짓게 되었을 때 큰아들의 이름은 작명소에서 조금은 비싼 돈을 주고 지었고, 작은 아들의 이름은 남편이 일주일 작명책을 빌려서 공부를 하면서 지어줬는데 그때 우연히 나의 이름도 찾아봤거든...  물론 아빠께 말씀드리지는 않았지.  그렇지만 내 이름이 흉명이든 길명()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

아빠의 깊은 뜻을 알고 있는 걸...


요즘 연세가 드시며 부쩍 야위시고 몸이 안 좋아지신 우리 아빠, 제발 아빠가 언젠가는 조금씩이라도 빛나는 둘째 딸을 오래오래 보실 수 있었으면 참말 좋겠어.



- 이 글의 초고는 2024년 8월 4일 주일 새벽 2시가 넘어서...


엄마가 폐암수술 후 입원해 계실 때 ㅇㅇ병원에 있는 교회 이곳 예배당에서 아빠와 함께 엄마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했었다.
아빠랑 커피숍에서...그리고 아빠가 직접 키우신 마당의 천일화~♡






아버지께

- 친정아버지 칠순을 기념하면서

                                            이은희

      


가만히 냉수 한 사발
마루에 놓아두면 그대로 얼음이 되던
어린 시절 그 겨울
에덴 유치원까지 혼자 걸어가기 멀기만 했던 일곱 살
칼날 같던 바람에 여린 손등이 쩍 갈라져 피가 나던 것을 보셨던지
그날 밤, 나를 위해 사 오셨던
꽤 값나가는 빨간 캥거루 표 가죽 장갑

삼십 대의 눈썹 진한 멋쟁이 그 남자는
일흔의 노신사가 되었네요
학창시절 문학을 좋아했고,
일찍 일을 마치고 오면 툇마루에 누워 읽던 세계문학전집도 색 바랬지만
그 모습 보고 자란 둘째딸은
그맘때 당신 나이만큼 엄마가 되었고, 시인이 되었네요

세월이란 강을 타고 당신의 청춘이 흘러갔지만
당신의 힘으로 일구어낸 네 딸의 가정이 있어
일흔 인생이 더 행복하시리라 믿어요
이후로도 오래도록 하루하루 빛나는 당신의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 이은희시집 『아이러니 너』 中 <아버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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