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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연 Sep 21. 2024

글 쓰는 여성은 모두 생존자다

매기 도허티,  <동등한 우리 : 집 안의 천사, 뮤즈가 되다>  (1)


1. 안락한 감옥

"평생 원하는 것을 위해 분투하며 살았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아름다운 교외의 단독주택. 깨끗한 주방. 오븐에서 매일 구워지는 푸딩, 아이들의 웃음소리. 출근하는 남편.

냉전 시기의 미국은 '자유와 행복'이 필요했다. 평화롭고 번영하는 가족이 곧 국가를 지키는 가족이었다.


  이제 여성들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삶을 산다. 부유한 남편이 있고, 최신 가전제품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다. 어머니의 미소로 아이들을 위한 케이크를 굽는다. 전쟁 이후 대학에 다녔던 시절, 마음껏 활동했던 날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채는 소리에 기억은 끊긴다. '현실의 행복'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런 아름다운 삶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모두가 행복이라고 불렀던 삶이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여기, 안락한 감옥을 벗어나, 영원한 예술가가 되고자 한 여성들이 있다.



2. 작가-인간-여성으로서


  매기 도허티의 <동등한 우리>는 '동등한 우리'라고 불리는 레드클리프 독립연구소 장학생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1960년 번팅이라는 여성 과학자는 레드클리프 독립연구소 장학금을 통해 냉전기 미국의 낭비되는 여성 인력을 교육하고자 했다. 레드클리프 독립연구소는 경력을 더 이상 잇지 못한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앤 섹스턴과 맥신 쿠민 - 시인이자 퓰리처상을 수상한, 그리고 깊은 우정을 나눴던 두 여성을 중심으로 마치 소설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속에서 나는 어머니라는 여성적 역할의 틀을 벗어나 학자, 시인, 그리고 예술가가 되고자 한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성과 예술을 다루는 책들 중에서 <동등한 우리>를 집어든 이유는, 사라지기를 거부하고 '영원한 시인'이 되고자 발버둥 쳤던 여성들이 '함께했을 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직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의 혁명의 물결이 일기도 전,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한 여성과의 연쇄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무엇을 꿈꾸고, 어떻게 꿈을 이뤄냈을까. 이 여성들에게 글과 예술, 학문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 여성 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


  <동등한 우리>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글과 예술, 학문이라는 '창조적 행위'를 위해 여성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새로운 기회를 얻은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돈과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여성들은 창작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돈을 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보채는 아이들과 떨어져 있을 공간을 절실히 원했다. 물론 장학 프로그램은 단기적인 해결책이었고, 이미 경력을 가진 이들이 선발되었다. 한계는 분명히 있었지만 (이는 다음 화에서 다룬다) 덕분에 우리는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도 전, 여성들이 어떻게 물질적인 지원으로 창조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인생을 바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한 여성들 중 가장 깊은 인연을 이어나갔던 이들이 바로 '동등한 우리'였다. 앤 섹스턴, 맥신 쿠민, 틸리 올슨, 바버라 스완, 마리아나 피네다. 이 다섯 명의 여성은 서로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평가했다. 그들은 서로를 지지했고, 비판했으며, 때로는 갈등했다. '동등한 우리'는 여성의 이야기면서도 결국 '창작자'의 이야기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않는 길을 걸어간 여성들은 서로의 뮤즈가 되었다. 그들은 성적 긴장감으로 가득 차있는 남성들의 공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남성이 주는 안정성을 위해 여성들이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영감과 창조를 위해 경쟁했다. '동등한 우리'의 꿈은 남편과 아이들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동등한 우리'의 시인이었던 섹스턴과 쿠민은, 끝내 퓰리처상 수상자가 되었다. 두 시인의 성공은 곧 레드클리프 독립연구소의 성공이었다.


  '동등한 우리'에게 글과 예술은 여성의 자아와 삶을 뛰어넘는 방식이자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레드클리프 독립연구소는 번팅이라는 한 여성의 실험에서 시작해 결국 문학과 예술의 한 시대를 만들어나간 여성들을 창출했다. 수많은 여성들과의 '연쇄적인 만남'이 주는 메시지는, '동등한 우리'의 틸리 올슨이 말한 대로다.


"글 쓰는 여성은 모두 생존자"다.


  '동등한 우리'는 여성적인 역할을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썼다.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여성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써 내려갔다(비록 정치적인 페미니즘이 아니었더라도). 레드클리프 독립연구소의 실험은 오랜 시간이 지나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동등한 우리'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창조적인 여성 모두가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투쟁의 역사 위에 서있음을 느끼게 한다.

  



3. 여성의 공동체


"남자들은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한다고 아직 확신하지도 않아요.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 틸리 올슨


  1999년 10월 1일, 레드클리프와 하버드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레드클리프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개방된 레드클리프 고등연구소가 되었다. 여성들은 21세기의 전환점에서 아직 여성의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젠더 이분법이 도전받는 현대에 들어 여성대학의 유효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성의 공동체는 필요하고, 유효하다.


  <동등한 우리>는 한국의 여성대학에 다니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가족으로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적은 여자인걸 모르냐, " "몇몇 과격한 여자들의 이상한 사상에 물들까 걱정이다." 하지만 나는 이 대학, 여성의 공동체에서 더 이상 '여대생'이 아니었다. 나는 더 많은 걸 배우고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 넘치는 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학생회장은 당연히 여성이고, 학과의 대표도 여성이다. 이곳에서 여성의 지위와 야망, 그리고 꿈, 즉 '나대는 여성'의 정체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성애자의 성적 긴장감이 없는 공동체 안에서, 심지어 스스로 여성이라는 의식도 거의 없었다. 여성의 공동체는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우리는 누울 수 있는 어디든지 자리를 잡고 낮잠을 즐겼다. 남녀공학의 여학생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웠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중고등학교 시절 남녀분반을 겪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적어도 4년이라는, 인생에서 짧고도 긴 시간을 여성 공동체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생의 일시적이고 영원한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날 여성들이 책을 내기 위해서 남편의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대학에서 자신의 약혼반지를 자랑하는 일도 거의 없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럼에도 글을 쓰는 여성은 모두 생존자다. 아직 남녀의 임금이 동일하지 않다.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폭력은 여전히 자기 파괴적 행위로써의 자살과 자해다.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과 아이들을 위한 가사노동의 틀에 갇혀있다. 앤 섹스턴이 그러했듯, 원하는 삶을 위해 평생 노력하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동등한 우리'가 처해 있던 환경과 지금은 매우 달라졌으면서도 많은 것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 환영받지 않는 풍조 속에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만드는 창조의 활동은 매우 중요하다. 그 자체로 여성이, 여성의 꿈이 살아남았다는 증거이다. 포기하지 않은, 살아남은 여성들의 공동체는 그만큼 귀중하다.


여성의 공동체는 필요하다. 남성들이 그 필요성을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레드클리프 독립연구소는 여성의 삶을 일시적으로, 때로는 영원히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 여성들의 모습만이 이 실험이 보여주는 전부는 아니다.


연구소의 뒤편, '동등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학력도, 돈도, 지위도 없었던 이들이 있다. '동등한 우리'의 빛나는 성공 뒤에서 초라하더라도 꿈을 꾼 여성들이 있었다. '너무나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매기 도허티, <동등한 우리 : 집 안의 천사, 뮤즈가 되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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