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 도허티, <동등한 우리 : 집 안의 천사, 뮤즈가 되다> (2)
문학은 무시당한 사람들의 삶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니 당신도 써야만 한다.
- 틸리 올슨
아직 더 할 얘기가 있나요?
학문적, 예술적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을 위해 작업 공간과 장학금을 마련한 래드클리프 독립연구소. 연구소는 경력 단절 여성들의 희망이 되었다며 많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아쉬움과 비판의 목소리도 들렸다. 앤 섹스턴, 맥신 쿠민 등은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열정을 호소했고, 래드클리프 연구소 장학생으로 선택되었다. 하지만 지원조차 포기해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배우고 창조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대학에 가지 못했고, 가난했다. 때문에 창작의 경험을 가질 수 없었고, 이을 수 있는 예술적 경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 그들은 예술적 창조의 능력 이전에 인간성조차 인정받지 못한, 백인성을 가지지 못한 흑인 여성들이기도 했다.
이 글은 '동등한 우리'의 이야기, 그 뒤편에 있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창조성을 촉진하고자 했던 래드클리프 연구소의 계획에 인종의 구성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결국 지원할 수 있었던 여성의 정체성은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 흑인 여성의 교육 기회는 금지되지 않았지만, 흑인을 입학시키려는 노력도 없었다. 이 '창조성의 샘'에 닿지 못했던 흑인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래드클리프는 지금 당장 노력하라!”
1968년 12월 10일, 흑인 여성 학생 24명이 래드클리프 연구소장 번팅의 사무실이 있는 페이 하우스를 점거했다. 섹스턴과 쿠민이 래드클리프 연구소에 오기 위해 면담을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흑인 여성들은 래드클리프 대학의 흑인 입학 확대를 요구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통했고, 이듬해에 서른 명의 흑인이 입학했다. 변화에 발맞추어 연구소도 장학생 집단을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연구소에도 흑인 여성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1971년, 스물 일곱살의 작가 겸 교사였던 흑인 여성 앨리스 워커가 연구소에 발을 들이게 된다.
발굴자, 남부의 천재
앨리스 워커는 자신의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흑인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발전시켰다. 특히 소설 <메리디언>은 작가인 워커처럼 인권운동과 가족을 향한 헌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이 소설로 워커는 미국 문단의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흑인 문학으로서 문단을 변화시키는 작가가 되었다. 또한 워커는 웰즐리대학에서 최초로 흑인 여성 작가에 대해 강의헀다. 워커는 학생들이 자신이 경험한 인종차별에 관한 글을 쓰게 했다. 워커는 흑인에게 내재한 '부정당했던 역사의 일부'를 발굴하고자 했다.
워커가 발굴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워커는 잊힌 흑인 여성 작가들을 발굴했다. 래드클리프 연구소에 있는 동안 워커는 소설가이자 인류학자였던 흑인 여성, 조라 닐 허스턴에 대해 연구했다. 허스턴의 최고 걸작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결혼과 가정폭력, 자연재해, 지인의 험담과 복수를 극복하고 자신으로서 살아남은 흑인 여성 재니 크로퍼드의 이야기다. 백인 비평가들은 이 책을 칭찬했으나, 흑인들은 흑인 공동체 방식의 재현을 문제삼았다. 결국 1960년 허스턴이 세상을 떠난 시기, 그의 책은 모두 절판되었으며 그는 표지 없는 무덤에 묻혔다.
하지만 워커가 보기에 허스턴은 문학적 영감이자 롤모델 그 자체였다. 그리고 허스턴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꼈다. 그래서 워커는 허스턴을 부활시키고자 여행을 떠났다. 여행 내내 워커는 허스턴의 인생 이야기와 무덤의 장소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허스턴의 사생아 조카인 척 하기도 했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흑인 작가가 서로 이어져있다는 생각을 반영한 악의 없는 거짓말이었다.
끝내 워커는 무성한 잡초들 사이, 표지 없는 무덤을 발견헀다. 허스턴의 무덤이었다. 워커는 묘비 제작자를 찾아가 허스턴이 미래에도 기억될 수 있도록 새로운 묘비명을 새겨넣기로 했다.
조라 닐 허스턴
"남부의 천재"
소설가 민속학자
인류학자
1901~1960 *실제로는 1891년생이다
이 묘비는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있었다>는 흑인 여성의 삶을 담아낸 최고의 영문 문학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워커는 허스턴이 무관심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역사에서 기억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여성의 고통은 같지 않다
워커와 허스턴의 이야기, 그리고 이전에 다룬 '동등한 우리'의 이야기는 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는 여성이 겪는 현실이 유사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동등한 우리>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제적 능력, 노동의 필요성, 사회적 지위, 인종, 가족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달랐다. 그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내용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었다. .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연구소의 여성들에게 중요했던 창작에 대해서이다. '동등한 우리'와 달리, 흑인 여성들에게 글쓰기와 출판 문화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었다. 흑인 여성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통을 재현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행동은 곧 정치적인 작업이었다. 대부분이 부유한 백인 여성으로 이루어졌던 '동등한 우리'의 연구소가 그다지 정치적이고 공격적이지 않았던 (페미니즘적이지 않았던) 상황과는 달랐다.
래드클리프 연구소의 섹스턴, 쿠민, 올슨, 그리고 워커는 각자 다른 처치에서 고뇌했고, 투쟁했다. 그들의 욕망, 필요도 다양했다. 결국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과 고통의 유형은, 세계에 존재하는 여성의 수 만큼이나 다양하다
수없이 다양한 여성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여성들은 더이상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백인 여성들은 안락한 감옥 속 어머니라는 존재를 넘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흑인 여성들은 여성 인권 운동의 주변부에서 벗어나 투쟁의 중심에 서고자 했다. 여성들은 이제 여성적 역할과 인종을 넘어 학문적, 예술적으로 사회에 기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으로 이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아직 갈길이 멀다. 아직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과잉진압을 받고 있으며, 유색인인 동양인 여성의 위치는 취약하다. 한국의 페미니즘의 물결에도 백래시는 여전하다. 젠더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등한 우리> 속 여성들과의 연쇄적인 만남은, 과거의 창조적인 여성들과 지금 우리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시와 소설, 회화, 연구와 같이 창조적인 행위를 갈망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해방의 시대가 이어지는 지금, 우리는 이 만남에서 각자 다른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다. 자신 안에 내재했던 창조성과 욕망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과거의 여성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새로워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욱 창조적이고, 혁명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세계적인 페미니즘 물결에 대해 남성들은 자신의 특권을 여성들에게 빼앗겼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특권을 잃지 않았다. '동등한 우리'의 올슨이 말했듯이, '특권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그 특권을 모두가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제일 뿐.'
또한 투쟁을 통해 여성들의 없었던 특권이 생겨났다고, 새로운 욕망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던 욕망을 깨닫고, 이를 실현하고자 투쟁해왔다. 여성들은 진작 가졌어야 할 특권을 위해 분투했고, 이제 그들의 시간이 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