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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연 Oct 12. 2024

어른들이나 잘하세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 미술관 <다섯 발자국 숲>

어린이도, 어른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어린이와 어른은 모두 온전한 존재다.
우리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모두 함께 성장 중이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다양한 존재들을 생각하다 보니, 결국 세상의 가장 작고 소중한 존재인 어린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혼 비출산을 선언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나는 또래에 비해 어린이를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단순히 육아와 별개로 우리가 어린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궁금했다. 어린이는 예술의 감상자가 아닌 생산자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예술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어린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안고 이 글은 시작되었다. 


1. 알아서 할게요


   예술적인 탐구로서 어린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부모 입장의 육아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엄마의 말로는 '산후조리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가 시작'이다. 부모의 돌봄 시간, 경제적 능력과 교육 수준은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끊임없이 비교된다. 그래서 육아와 관련한 SNS 댓글은 항상 전쟁터다. '영어유치원 보낸 애들은 영어 발음부터가 다르다는데...'와 같이 걱정과 불안감을 조장하는 댓글부터, '책 그렇게 읽으면 자폐 생겨요' 같은 충격적인 말까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뒤처진다는 불안감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아이에게 풍부한 경험을 안겨주고 싶은 게 아니라, '자폐를 피하고 싶다'는 이유로 책을 읽힌다는 것 또한 문제이다).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했으나, 알면 알수록 진짜 문제는 어른들과 우리 사회에 있는 듯하다. 


  영어유치원이나 책 읽기, 음악이나 운동까지 어른들의 불안감에 의한 주입식 교육은 하나의 편견으로 이어진다.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이걸 넣으면 이렇게, 저걸 넣으면 저렇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또 주입하지 않으면 평생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미숙한 존재다. 영어유치원에 보내지 않으면 평생 Apple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언제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했으며, 하는 대로 결과가 나왔는가. 아이들은 누가 강요해도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하고 싶고, 재밌는 일이면 한다. 열심히 한다고 꼭 좋은 성과가 나오진 않는다. 어른이라고 무엇이 다른가! 소리치고 싶지만 경쟁사회에서 아이를 살아남게 해야 하는 부모님들의 고충도 이해한다. 하지만 어린이가 어른을 독자로 쓰는 일본 <가메오카 어린이 신문>의 한 기자는 어른들의 잔소리에 이렇게 답한다.


 "하고 싶으면 알아서 할 테니까, 어른들이나 잘하세요!"


  결국 어린이란 존재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우리에게는 어린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회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나는 예술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예술만큼 모두가 자신을 펼칠 수 있는 분야가 있을까. 이곳저곳 수소문 해 어린이 프로그램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참여 자격에 문제가 있어 과천 어린이 미술관으로 만족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들이 아침부터 뛰어노는 서울대공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오는 곳이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젠 유아차를 타는 호화를 누리지 못하고 두 발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점일까.


  서울대공원의 호수 둘레길을 지나 과천 어린이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는 계속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예술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 미술관 체험 등 ‘아이들을 위한’ 예술은 많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직접 창작한 작품. 즉 ‘아이들의 예술’을 찾고 싶었다. 내가 가는 곳은 국내외의 유명 어린이 극단이나 거창한 학술대회가 아니었다. 이 작은 미술관에서 아이들의 창의성을 찾을 수 있을지 고심했다.


  다행히 과한 걱정이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자랑인 3층 높이의 거대한 작품 <다다익선>에 비해 반지하의 작은 전시장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아이들의 예술과 창조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찾는 것을 넘어 어린이라는 작은 존재가 어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


 

2. 작은 예술들


   과천 어린이 미술관의 <다섯 발자국 숲> 전시실에는 아이들이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작품 연계 체험활동이 가득했다. 그중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셋째 발자국>. 커다란 붉은말 조각상을 빙 두른 테이블이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말의 주위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구도와 각자의 방식으로 말을 그렸다. 조악하면서도 공들인 그림들은, 열심히 말과 종이를 번갈아보며 붉은 색연필을 바쁘게 움직였을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전시된 작품은 말 조각상이었고, 어린이의 그림은 체험 활동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림 주변을 맴돌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그림들도 전부 작품이 아닌가!' 테이블에 둘려 놓인 말 그림의 나열은 마치 미술관의 작품 컬렉션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놀고 간 흔적' 이겠지만, 나에게는 아이들의 그림 자체가 어린이 미술관의 작품이었다. 내가 찾던 '아이들의 예술'은 거창한 어린이 극단도, 아동 예술교육 학술대회도 아닌 우리 주변의 어린이미술관에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린이들의 말 그림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3. 어린이의 예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엽서 크기의 종이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종이의 빈 공간에 하트와 날개를 그려 넣었을 마음, 자신과 가족이 여기에 있었음을 남기고자 한 마음. 처음이지만 용기 있게 그려낸 말 그림. 실제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리기(말 다리를 대충 선으로 해치운다던가). 보호자와 함께하며 완성하는 모습. 말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이히힝' 소리를 내는 글귀를 써주고, 이름을 붙여주는 모습까지. 나에게 ‘이 말을 그려보세요’라고 했을 때는 나오지 않았을 예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 그림들은 그 자체로 이 미술관의 작품이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위해 마련한 체험의 장을 넘어서, 남겨진 예술작품들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었다. 


  테이블을 두 바퀴, 세 바퀴 돌며 그림에 담긴 어린이들의 흔적을 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나는 어린이의 순수함에 놀라면서도 어른과 어린이는 그다지 다른 존재가 아니구나, 깨닫게 되었다. 한 어린이는 종이 한구석에 ‘말 그리기 초보예요’라고 적었다. 그래, 이 친구는 말을 처음 그려보는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나도 인생에 말을 그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크고 붉은 조각상 말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이곳에서 '커다란 붉은말'을 처음 그리는 삶의 경험을 안고 갔을 것이다. 게다가 이 커다란 붉은말을 혼자서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는 어른이나 어린이는 없다(물론 당신이 극사실주의 화가라면 다른 얘기겠지만!). 어린이들은 난관에 봉착했을 때면 보호자를 불러 함께 그렸다. 그리고 종이 한구석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놓는다. 'ㅇㅇ랑 엄마랑'. 그리고 두 이름을 감싸는 커다란 하트까지. 이토록 나에게 삶의 경험을 돌아보고 타인과 함께하는 가치를 알려준 존재가 또 있을까. 나는 지금껏 보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4. 결국 우리를 위한 이야기


  어린이와 예술의 관계를 넘어, 당신에게 어린이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리고 당신이 어린이에게서 배울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 책에서 많은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일상 속에서 어린이만큼 ‘논쟁적인’ 존재는 없다. 어린이의 미성숙함과 주체성을 동시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노키즈존과 아기 울음소리에 대한 혐오가 당연해진 세상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어린이에게 귀를 기울여 보라는 이야기가 전해질까. 어린이의 다채로움과 그 삶에 공감하자는 목소리, 그들에게도 자신만의 욕구와 동기가 있다는 메시지. 결국 우리 모두가 이 세상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동등한 존재라는 말이 닿을 수 있을까?


  이 글은 어린이만을 위한 깨달음의 메시지가 아니다. 이 글은 어린 나이에 집착하지만 '지적, 도덕적 우월함'이라는 억지스러운 어른의 권위에 붙잡혀있는 우리의 딱딱한 편견을 위한 깨달음이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건 우리가 지나온 어린 날들에 대한 존중이자, 지금의 어린이에게 더 나은 환경을 물려줄 기성세대의 책임이 실존함을 깨닫는 기회이다. 어린이의 존재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가치를 잇는다. 


  물론 어린이가 성숙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린이는 경험이 부족하고 미성숙하다. 아직은 돌봄이 필요하다. 어려운 일은 혼자서 잘 해낼 수 없다. 그런데 우리라고 다르겠는가? 어린이보다 20년을 더 살든, 40년을 더 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은 너무 많이 남아있다. 우리도 타인의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필요로 한다. 어린이도, 어른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어린이와 어른은 모두 온전한 존재다. 우리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모두 함께 성장 중이다’. 성장은 삶을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이와 우리는 똑같지는 않지만 동등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살아온 시간은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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