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나, <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바다출판사, 2019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미술대학 입시를 하던 나는 나름대로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멋진 예술가(?)를 꿈꾸고 있었다. 당시 처음 보다시피 한 문화예술 유튜브 채널 '너를 위한 문화예술'에서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를 소개했다. 독서기록부나 좀 채워야겠다는 가벼운 생각만을 가지고 서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책은 미술대학이 아닌 인문대의 학생이 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며 가끔씩 펼쳐보는 책으로 남아있다. 예술이 그저 멋진 그림을 그리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명확하게 해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후로 인문학에 관심이 생겨 독서클럽에 들어가 열심히 토론도 해볼 수 있었다. 미대 입시생으로서는 참으로 웃긴 일이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들은 멋진 예술가가 되고싶었던 원대한 꿈이면서도 사소한 호기심이었다는 사실을 가끔 떠올린다.
개인적인 사연이 얽힌 책이자 박보나의 한겨레 칼럼집인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 현대예술 작품에 담긴 작가의 태도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망한 단편의 글들이 모여 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작품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글 하나를 이야기하고 싶다. 바로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I Want a President)>이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는 미국의 미술가이자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운동가였던 조이 레너드(Zoe Leonard)의 글이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당시 스페인의 극우정당을 비판하는 동시에 실제 레즈비언이었던 아일린 마일스(Eileen Myles)의 대통령 출마 지지를 위해 쓰였다.
저자 박보나는 이 작품을 다루며 세월호 참사와 박근혜 정권의 무능함을 지적한다. 그는 희생자들과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한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에이즈에 걸린 대통령과 동성애자 부통령을 원한다.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 독성 가스를 뿜는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곳에서 성장해 백혈병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을 원한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를 지금에서야 다시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문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유족들의 아픔을 덜어주기는커녕, 이젠 추모하는 것조차 지겹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는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이 세월호 참사 추모식에 참여하길 거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부터 10년도 지나기 전인 2023년 11월 29일, 이태원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한밤 중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던 희생자의 수는 159라는 무미건조한 숫자로 남았다. 진정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들은 추모를 사치와 과민반응으로 만들었다. 죽음과 슬픔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진정할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였을 사람들, 진심을 다해 좋아하는 게 있었을 사람들을 잃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미래를 만들어갔을 159가지의 존재들을 잃었다.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미래고 희망이라는 높으신 분들의 말은 그들의 '진짜 책임' 앞에서 사라졌다.
결국 이 거대한 상실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막을 수 있었던 참사에 책임져야 할 이들은 그날 이태원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아파하고 있을까? 이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상실에 눈물 흘리고 있을까?
그들은 '레즈비언'이어 본적이 있을까?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의 ‘레즈비언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에 출마한 실제 인물의 의미를 넘어선다. 즉 낮은 곳에서 고통과 절망을 경험해 봤고, 그렇기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레즈비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과 권력층이 무엇이었는지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국민의 대표자로서 ‘단 한 번도 특권을 빼앗겨 본 적이 없고, 늘 권력의 중심이었던’ 이들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다시 정부의 무능한 대처와 회피를 보았다. 우리는 권력과 사익을 위한 일에는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대통령, 책임을 회피하는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덜 악독한 대통령’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대통령’을 원한다.”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관습과 틀을 벗어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 그 안에 담긴 태도들을 조명한다.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당신의 태도는 어떠한지 묻는다. 어떠한 태도를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시각적인 외형만으로 예술작품은 완성되지 않는다. 박보나는 작가가 가진 태도가 내용과 형식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한다. 작품의 태도는 우리가 작품을 해석하는 길을 보여주고, 그 길에 있는 가치를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외에도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작품들은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는 작가의 태도, 그것이 작품으로 드러나는 시도들을 보여준다. 개인의 정체성을 넘어 여성,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있어서 독자 스스로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나는 사회에 대해, 그 지도자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두 번의 참사와 거대한 상실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책을 읽는다면 스스로 마주하게 되는 질문들이다.
만약 당신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그런 개인들이 모여 인간의 삶과 죽음에 더 나은 태도를 가진 사회로 나아간다면 어떨까.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비참한 사회상에 대한 회의주의와 비난, 정치적 무력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생각,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이다.
이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 이 모든 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 정당하게 외쳐야 한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고. 나는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왜 이런 일들이 불가능한지 궁금하다. 왜 우리는 어느 시점에선가 대통령은 항상 광대여야 하는지. 왜 대통령은 항상 창녀가 아니라 창녀를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항상 노동자가 아니라 간부여야 하는지, 항상 도둑질하면서도 결코 처벌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배우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태도는 많은 것을 결정한다. 작품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