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 한국미국사학회
우리는 신화를 넘어 현실을 볼 수 있을까?
2024년 8월,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또 떠나야 했다. 전시 목록을 살펴보던 중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 홈페이지의 특별전 목록에서 한 전시가 눈에 밟혔다. 북미 원주민의 문화를 소개하는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북미 원주민 전시라니! 한국에서 이런 전시를 본 적이나 있었나. 미국사에 관심이 많아 학교에서 <신화의 종말>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이주민들이 그들의 팽창이라는 신화를 위해 북미 원주민을 학살하고 차별 정책을 펼쳤던 역사는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의 이해를 바탕으로, 전시가 원주민의 아픈 역사를 이야기하려나 하는 단편적인 생각으로 전시의 대략적인 설명을 보았다.
놀랍게도 우리가 '인디언', 즉 역사의 피해자이자 '사라진 사람들'로 여긴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에 문화예술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시를 보니 카약, 파카, 모카신, 이글루 등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도 모두 북미 원주민 문화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일상의 문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 채, 역사의' 승자'들이 바라는 대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 게 아닐까.
그렇게 지금까지 원주민을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이자 학살의 피해자들로만 여겨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야만인', '인디언'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다. 이것이 이번 특별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명료한 메시지다. 제목 하나만으로 인디언이라는 익숙한 감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북미 원주민을 바라보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이제는 비원주민의 입장에서 발명된 원주민의 서사가 아닌, 진정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이다.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은 북미 원주민의 다양한 문화와 사상,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예술을 선보인다. 수많은 유산들을 통해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생각한, 하나의 부류로 여긴 북미 원주민들이 사실은 미국 전역의 다양한 종족,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북미 원주민들의 대표적인 예술품인 직조공예와 도자기, 다양한 복식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지 않을까 싶다.
공예부터 회화까지 북미 원주민의 다양한 예술품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이주민들의 작품들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그중 이주민 사진작가들이 북미 원주민을 촬영한 사진 작품을 이야기하고 싶다.
미술작품에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진은 손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객관적인 기록과 증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은 사진 역시 작가가 선택한 모습과 연출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시 2부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커티스의 사진작품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에드워드 커티스의 사진들을 보면(이미지 내 왼쪽 사진 참고), 전통적인 북미 원주민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커티스가 활동한 1895년부터 30년간, 당시 북미 원주민들은 이미 이주민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북미 원주민들도 이미 오른쪽의 사진처럼 이주민들이 입는 셔츠를 흔히 입었다. 하지만 커티스의 사진에는 이주민의 영향을 받은 원주민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왜일까?
커티스는 원주민의 문화가 곧 없어지리라 생각했다. 때문에 이주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전통적인 인디언이라는 고정관념 그대로의 모습을 '선택적'으로 연출했다. 우리가 전통 원주민의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한 사진의 이면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던 다양한 원주민들의 모습이 가려져 있다. 우리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여긴 사진도 작품의 한 부류로서 어떻게 작가의 주관을 담아내는지 엿볼 수 있던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결국 사진을 비롯한 이주민의 예술은 원주민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했다. 회화작품에서도 이주민들은 원주민을 무력하거나 야만적인 존재, 때문에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그려냈다. 원주민들을 움직이지 않고, 무표정한 사람들 그려내며, 이주민들은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야망과 믿음을 확고히 했다.
그럼에도 원주민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주민의 예술을 비판하며, 원주민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드러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있다면 원주민들은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때때로 성조기 무늬를 직조해 낸 상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원주민들은 이주민의 옷을 일상적으로 입었다. 결국 원주민은 ‘문명인’의 문화에 항상 배타적인 것도, 항상 수용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식민지의 역사 속 이해관계는 복잡하고도 다양하다는 사실 또한 짚고 넘어가 볼 만하다.
원주민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 그들은 원주민에 대한 탄압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낸다. 루이세뇨족 프리츠 숄더의 작품 <운디드니 : 아메리카 대학살>은 원주민의 비판의식을 담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890년 12월 29일, '운디드니'라는 원주민 보호구역에 있었던 학살 사건의 비극을 눈 덮인 무덤의 쓸쓸한 풍경을 통해 드러낸다. 프리츠 숄더는 타협하지 않고 진심을 드러내고자 한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드러내며, 역사적 아픔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북미 원주민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낸다.
여전히 비원주민 예술가들은 원주민을 사라져 가는, 또는 사라진 존재로 그려낸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도 원주민은 역사 속에서 탄압받고 사라져 간 이들, 전통 의복을 입으며 야생에서 살아가는 이들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프리츠 숄더의 작품 <인디언의 힘>은 그럼에도 북미 원주민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의 작품은 주먹을 강하게 치켜들고 소리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사라진 게 아니라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고.
국중박의 특별전시와 이 글에서는 원주민의 문화를 아름답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외된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의 또 다른 시선을 제시해볼까 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지나치게 그들을 이상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소외된 이들에게서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동안의 왜곡된 시선을 반성하며 그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과정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소수자들의 문화와 삶이 아름답기만 한, 또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의 원주민은 아름다운 자연에서 아직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나가는 이미지로 쉽게 그려진다. 하지만 원주민이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 길가에서 구걸을 하고, 알코올 중독 문제가 심각하며, 법이 닿지 않는 원주민 보호구역에는 카지노가 즐비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고 나면 원주민의 문제가 새롭게 보인다. 은연중에 원주민은 완전무결하고 순수한 존재로 바라보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원주민도 똑같이 알코올에 중독되기도, 도박에 빠지기도, 서로를 죽이고 배신한다. 역사라는 아픔 속에서 에서 "원주민의 서사는 발명된다". 8월 20일 국중박에서 있었던 한국미국사학회와 이주사학회의 학술대회에서 발명된 서사와 원주민에 대한 다양하게 왜곡된 인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원주민들을 순수했지만 외부인에 의해 망가진 이들로 바라보며, 그들이 절대로 악하지 않은, 완전무결한 전통과 문화의 소유자로 또다시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본 걸지도 모른다. 한때는 멸시의 대상이었고, 지금은 우상이 된 '인디언'. 인디언이라는 신화를 넘어서 인간과 사회, 정치, 역사적 맥락으로서의 북미 원주민을 이야기해야 한다.
글을 마치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내가 시작한 이야기이면서도 스스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계속 떠올려야만 한다.
소외된 이들의 절대적 아름다움? 그들이 얼마나 불쌍하면서도 착한지? 나는 그들이 '나쁜 존재가 아니고 좋은 이들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전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다. 기쁘고 슬퍼하면서, 때로는 예민하게 굴고, 감정에 치우쳐 화를 내기도 하고, 크게 목소리를 내면서도 세상과 타협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소외된 이들은 신화가 아닌 현실의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