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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연 Aug 17. 2024

장애인이라는 세계

금호미술관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전시연계토크 /2024.7.6


  익숙한 주관에서 벗어나 또 다른 주관을 이해하기. 이것은 장애인을 넘어 우리의 삶과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실마리이다. 

우리는 장애인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 가족들도, 가까운 지인도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준다’며 이건 아니지 않냐는 말을 들은 게 엊그제 같다. 왜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보아야 하냐는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 그래도 이해해야 한다는 커뮤니티의 게시물, 겪어보지 않아서 말할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주변의 소음을 들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아,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에 살고 있구나. 매일 직장이나 학교에 가고, 지하철 속 사람들 사이에 끼어 집으로 돌아간다. 주말에는 가끔 미술관에도 가보고. 이번 전시는 꽤 재밌었어, 친구랑 떠들며 근처 맛집을 찾는다. 우리는 의심조차 해 보지 않은 당연한 일상.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일상조차 당연하지 않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선량한 시민’, ‘일반인’조차 되지 못한다.


  당연했던 일상은 결국 ‘우리만의 감각’이었다. 우리는 더 많은 이들이 함께 감각할 수 있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 감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며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더위가 막 시작된 6월의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전시를 찾느라 골머리를 앓던 중, 우연히 금호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전시연계토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문화예술의 접근성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는 듯 보였다. 특히 쉬운 전시해설에 관련한 강의에 이끌렸다. 당시는 필립 파레노 전시를 다녀오고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고 난 뛰었다. 리움미술관에서 생각했던 전시의 접근성과 해설에 관해 막연한 관심이 생겼던 때였다. 고민할 겨를 없이 신청을 끝냈다. 일본여행을 다녀온 직후겠지만, 흥미로운 일을 할 때는 피곤한 법도 잊는 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시연계토크 강의를 들으며 나 자신의 사고방식이 크게 흔들렸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샛노란 보도블록, 손으로 만지는 점자... 그것이 장애인에게 허용된 감각의 전부라고 은연중에 생각해 온 나 자신. 앞을 보지 못하는, 듣지 못하는 사람들. 비장애인이 내리는 장애의 기본적인 정의조차도 부정확했다. 금호미술관에서 듣게 된 장애인들의 진짜 이야기는 어땠을까. 그들은 빛으로 공간을 구분하며 벽의 다양한 촉감을 통해 교실을 구분하고, 향기를 기억해 도서관에 가는 일상을 살아간다.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새로운 깨달음에 감사하면서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나름의 지성인이라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결국 장애인을 비장애인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특정한 감각이 비장애인과 다르다는 사소한 이유로,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얼마나 '다른 존재'로 규정하는가.


  왜 지금까지 알지 못했을까? 강의를 들으며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장애인과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비장애인이 얼마나 될까. 이동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밖에 나가 아무리 찾아봐도 장애인을 만나기 힘들다. 스스로도 장애인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장애인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도, 점심메뉴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장애인'이라는,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추상적 존재로 보는 태도. 얼마나 잔인한 사고방식인가.


  장애인은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와 구분되는 시공간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시대의 사회를 살아가며 독특한 취향을 가진 개개인이다. 비장애인이 가진 개별성만큼 시각장애인들도 각자의 개성을 가지며, 장애의 특성도 그만큼 다양하다.





<구분을 넘어 함께 감각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과장 장은정 선생님은 대학시절 역사를 배우며 절대적인 객관은 없으며 역사적 사실 또한 주관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사학 전공으로서 아주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장애인을 이해했다고, 그들을 위한 시설이 있으니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비장애인의 주관으로 결정된 것이다. 진짜 필요한 것은 장애인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들이 직접 참여하는 기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은정 선생님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공간 오감>을 기획했다. '장애인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비장애인과 장애인들이 함께 다양한 감각으로 문화유산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공간 오감>이다. 장애인만을 위해 사회적 기회와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그친다면 결국 또 다른 고립과 배제라는 한계를 가지지 않을까.





<모두가 누리는 쉬운 전시해설>


  소소한 소통 총괄본부장 주명희 선생님의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쉬운 전시해설' 강의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주명희 선생님은 시각, 청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지적장애, 자폐성 장애)의 문화생활 경험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비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장애인들 모두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시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의 경험은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르다'.


  


  장애인들이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보편적인 (비장애인의) 생각과는 달리, 발달장애인들에게는 이동의 불편함이 거의 없다. 발달장애인에게는 프로그램 자체가 부족하고, 또 활동이 존재하더라도 그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애초에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기 어렵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방문하더라도 어렵게 쓰인 문구들과 전시해설로 인해 발달장애인들은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비장애인의 주관이 아닌,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장애의 세계는 넓고도 복잡하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비장애인들도 각자 다른 신체적 특징, 성격, 취향을 가진다. 그런 비장애인들 각각의 취향과 필요를 맞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이루어진다. 이제는 함께 감각하기 위해서 그 노력을 장애인들도 함께 누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비장애인이 느끼는 것을 넘어, 장애인들이 감각하는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주명희 선생님은 복지정책부터 전시해설까지 쉽게 풀어쓰는 활동의 경험을 전했다. 그 과정에서 쉬운 글쓰기가 단순히 발달장애인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발달장애인, 어린이뿐만 아니라 비전문가에서 전문가까지, 쉬운 전시해설은 누구에게나 이해하기 쉽게 다가왔다. 예술에 대한 특별한 지식 없이 전시를 방문하는 이들 모두에게 쉬운 전시해설은 유용하다. 


  실제로 2023년 현대미술사 과제를 위해 방문했던 키키스미스 <자유낙하> 전시에서 쉬운 전시해설을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위한 쉬운 말풀이로 생각해 기존의 해설 옆에 또 다른 글이 붙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제야 그 쉬운 해설들이 주명희 선생님의 작업물임을 알게 되었다. 나름 미술사 전공이라고 우쭐대며 전시를 본 자신도 어려웠던 작품들이 몇 있었는데, 쉬운 전시해설을 보고 빠르게 이해한 기억이 난다. 결국 발달장애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술의 가치가 더 쉽게 전달될 수 있기 위해서는 쉬운 전시해설이 필요하다.



  쉬운 해설에 대해 '왜 예술이 쉬워져야 하느냐'라고 물은 전문가도 있다. 주명희 선생님의 답변은 인상 깊었다. 전시장에서 예술에 대한 정보를 더 쉽게 전달하는 것은 예술의 가치를 낮추지 않는다. 오히려 쉬운 해설은 예술의 가치를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 더 많은 이들이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해 볼 수도 있겠다. 왜 예술이 어려워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따금 전시장에서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 좌절감을 느껴야 하는가? 아무런 지식 없이 온 사람부터 예술 전공자까지, 전시장에 들어선 누구든 예술에 대해 알 권리를 가진다. 관객이 작품 앞에 섰다면, 그 작품은 충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작품을 이해하고 감탄하며, 전시장을 떠나서도 자신만의 관점으로 곱씹을 수 있어야 한다.







  글로는 다 담기 어려운 많은 이야기들을 금호미술관에서 들을 수 있었다. 글을 막 쓰기 시작했던 시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타인의 경험과 가르침을 전해 들으며 나 자신도 돌아볼 수 있었다.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들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던 만큼 글의 짜임이 부족하진 않을까 걱정이다. 완벽하진 못해도, 더 나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 욕심일 것이다. 앞으로도 금호미술관에서 얻은 깨달음을 전할 기회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주관에서 벗어나 또 다른 주관을 이해하기. 이것은 장애인을 넘어 우리의 삶과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실마리이다. 


우리는 장애인들의 이야기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Who tells about the things we do not find?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전하는 이야기. 
우리는 남겨지지 않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Historika Museet, The Empty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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