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쏟고 갔는데 그날 어땠어요? 막 쏟진 않았지만, 내면에 가득함이 보였는데,, 괜찮았었나요?
아.. 후폭풍이 무기력증으로 와서 결국 아무것도 못했어요. 교회에서 성가대를 맡고 있는데 책임감을 잠시 외면하고 나가야지만 반복하다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갔어요. 파업이라고 하죠. 파업했습니다.
통제적인 엄마 밑에서 자라서 통제적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자기감정 받아들이고 잘 쉬었네요.
얼마 전에만 해도, 울어도 할 건 해야지라는 마인드였는데, 올해부터 많이 바뀌려고 노력 중이에요. 스스로 통제적이지 않게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네, 너무 잘하셨어요. 저번 주에 이어서 트라우마를 또 꺼내자고 하니 이번에도 쏟아내야 해서 힘들 것 같은데, 다른 주제로 이야기해보려 하는데 어때요?
네, 괜찮아요
성인애착유형 상담
초반에 상담일지에 안정형 애착유형으로 가고 싶다고 적었다.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랐고, 대인관계, 친구관계는 어땠는지 압축적으로 요약하며 짧은 시간 내에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통제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나에겐 자율성이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엄마는 학교 끝나면 무조건 집으로 오라고 했고, 친구들과도 놀지 못하여 교우관계는 학교에서만 유지됐다.
나는 이런 감옥 같은 집에서 벗어날 전략을 짰다. 성인이 되면 무조건 나간다. 그렇게 남들은 친구들이랑 놀 시간에 나는 공부를 했으니 성적이 매우 좋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포기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집', 벗어날 수가 없다. 서울권에 있는 대학교는 합격증이란 만족감만 품고 나는 모두 포기했다. 그리고 경기도에 기숙사가 있는 대학교를 선택했다. 어차피 취직이 잘 되는 전문직이라 학교이름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미래의 나보단 현실의 내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최선의 탈출구를 현실화하는 것뿐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바로 입학금을 넣고 부모님께 통보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나르시시스트)를 만나다
타인에게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기대가 매우 크다.
타인을 끊임없이 비난하거나 괴롭히거나 깎아내린다.
개인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하여 타인을 이용한다.
타인으로부터 끊임없는 인정을 요구한다.
타인으로부터 특별대우와 복종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강렬하게 질투한다.
스무 살 때부터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감정, 자아 모두 부모님이 컨트롤해서 늦은 자아가 만들어졌다. 숨 막혀 죽을 뻔한 집에서 벗어나 이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뭘 먹고 싶은지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와도 잘 지내다가 점점 나를 깎아 자기의 위상을 올리려는 자기애적 인간을 만났다. 4년간 매일같이 봐야 하므로 불편해도 참았다. 어차피 졸업해서 손절하면 된다는 목적이 생겨서 친구가 떠나도 아쉽지 않고, 내가 떠나도 아쉽지 않았다. 내면의 단단한 내가 항상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생에서 내가 제일 중요
사회초년생 때부터 대인관계를 잘 형성하는 누군가를 보면서 학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병원생활도 순조롭게 이어갔고, 선배간호사들은 나를 잘 챙겨주며 이쁨 받는 사람이 되었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이기에 친분을 딱 거기까지만 쌓았다. 더 깊게도 그렇다고 너무 얕게도 아닌 적정선을 유지하며 안정적이고 얕고 넓은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언제나 관계는 가볍게, 인생에서 중요한 건 나라고만 생각했다.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 때 의료진이 부족하다며 중수본에서 간호사들에게 요청을 했다. 심지어 대구에서는 도와달라는 호소문까지 내려왔다. 의료인으로서 사명감을 발휘하여 코로나 최전방에 있는 지역에 내려가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대구는 마스크를 안 쓰고 공기를 마시는 순간 코로나에 걸린다고 생각했고, 코로나 잘못 걸리면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눈앞에서 쓰러지는 동료도 보고, 어제 같이 일하던 동료가 코로나 걸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 달며 생사를 싸우는 모습도 보고, 결국 죽어서 사후처리까지 했던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트라우마들이 생겼고 치유하지 못해 현상태 유지로 가져가는 중이다.
처음 느껴본 일관성 있고 안정된 사람
그 힘든 시기에 코로나 확산은 줄어들다가도 몇 년을 이어갔고, 전우애처럼 서로를 다독이며 친해진 강원도 원주언니와 처음으로 좁고 깊은 관계를 가져가게 되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성인이 되면 화해하기 어려운데 화해도 엄청했다. 관계는 항상 쌍방이다. 내가 느끼는 건 상대방도 무조건 느낀다는 걸 알았다. 서로의 단점까지도 보면서, 그 단점마저 품고 가며 지금까지 서로의 든든함을 느끼는 중이다. 멀리 있어도 정서적인 안정감을 유지하며 언니이자 벗인 그런 소중한 사이가 됐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주는 친구가 있으면 좋은 거구나'라며 그때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바꿀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었다.
충고
현재까지의 일들을 나누며 선생님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봐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는 회피형이 아니라고 하셨다. 회피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지하면서 내면의 단단한 나 자신을 잘 잡고 나가자고 하셨다. 관계에도 책임감이 따른다. 앞으로 책임감의 요소는 없고 필요에 의한 욕구로만 지내왔던 것들을 조심하고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행동을 알려주셨다. 여기서의 지혜로움이 발현되면서 훈련이 될 수도 있고, 손해보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 자신의 욕구도 잘 알고 잘 받아들이며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