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과 폴라로이드가 가르쳐 준 것들

by 책방삼촌


아기 때부터 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매사 소극적이고 경쟁하려 하지 않고 주로 양보하는 아이였다. 반면 엄마에게는 끝없이 예쁜 짓을, 아빠에게는 지치는 법 없는 놀이 요구와 장난을 거는 아기이기도 했다. 엉뚱한 손발짓 하나로도 폭소를 하는 놀아주기 좋은 아이였다.


"안아..." "놀아..." 그 말이 이리도 그립다.


아이는 심하게 조르거나 떼쓰는 일도 많지 않았는데, 다만 어쩌다 한번 관심이 꽂히면 벼랑 끝에 선 각오인 듯 물러남이 없었다.


초여름 바람이 머리칼을 건드려 살랑이던 어느 주말이었다. 서너 살이던 현이의 조막손을 잡고 둘이서 동네 산책을 나섰다. 조금만 힘들어도 안거나 업어달라고 응석 부리던 때였고, 아직 앳된 아빠의 등에 얼굴을 묻고 곧잘 잠이 들곤 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생글생글 아장거리며 잘 걸었다. 길 옆 꽃과 잡풀, 지나는 개미에도 관심을 보이고 까치 한 마리만 푸드덕 날아도 "우와!"를 연발했다.


간밤에 잠을 잘 잤나? 특별히 그럴 일도 없이 누웠다 하면 팔다리 활짝 펼치고 깊이 자는 아기였는데, 그새 조금 더 큰 건가? 내 아기는 낯선 말 한마디만 해도 혹시 천재인가, 궁금해하던 나는 아직 어린 아빠였다.


작은 언덕에 올라 동네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놀았다.


"와! 저기 우리 집도 보이네."

"우와!"

"어, 우리 집 아닌가?"

"우와!"

"큭큭, 잘 모르겠네. 좌우지간 우와!!"

"우와아!!"


함께 깔깔 거리던 날의 공기가 지금도 들숨 따라 올라왔다 가라앉곤 한다.


"아빠!"

"응?"

"현이 잘 했져?"

"그럼, 오늘 잘 걷고 잘 웃고 잘 놀고 예쁘지."

"그러면... 현이 따라 해 봐!"

"응? 뭔데?"

"음... 어이구 우리 현이, 잘 걷고 잘 웃고 잘 놀았쯔니까 아빠가 아이쭈크림 사주야겠네, 해봐!"


한방 크게 맞은 아빠는 웃다 쓰러져 바닥을 뒹구는데 아기는 조급해진다.


"아니이이! 그냥 따라 해 보라고!"

"현이 저번에도 아이스크림 먹고 배 아팠던 거 아냐?"

"그냥 따라 해 보라고! 어이구 우리 현이, 아이쭈크림 사주야겠네에에."

"그럼 아이스크림 사줘야 하잖아?"

"아니이이! 그냥 말해 보라고오!"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맛을 알았을까. 시골 내려가는 길, 아기에겐 아직 먹이지 않던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하나 샀다. 아직 이게 뭔 지조차 모르니 달라고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양손을 하늘로 들고 처절한 앙탈을 했다. 이게 그 벼랑 끝 각오로 하는 시위의 시작이었다.


한입이면 되겠지, 하고 건넸더니 웬걸. 세상에, 이런 맛있는 걸 아빠만 먹고 여태 안 줬다고? 하는 동그란 눈을 하고 하나를 싹 다 먹어 버렸다. 한입도 못 먹은 아빠는 입맛을 다시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아이쭈크림은 그렇게 현이의 마음자리를 크게 차지했다.


배탈 날까 하는 우려를 핑계로 하늘 맑은 그날 산책길, 끝내 아이스크림을 사주지 못한 융통성 없는 아빠가 나였다.


그렇게 아이는 자라고, 시간이 흘러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이스크림 대신 손에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 있다.



초등학생이 된 현이는 어느 날부터 폴라로이드 카메라 갖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다.


생일을 맞아 폴라로이드 선물을 내밀었더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여기저기 들이대고 신나게 찍어서 긴 줄에 집게로 걸어두던 현이.


우리의 일상과 소풍이나 여행에 폴라로이드가 동행했다. 이러다 당장 필름이 모자랄 것 같아 무심코 했던 아빠의 한심한 한마디는 "그렇게 아무거나 막 찍으면 아까울걸?"이었다.


그 이후 소심해진 아이는 셔터 누르는 손길에 망설임이 생겨 버렸고,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손에서 놓고 말았다. 이런 멍청한 아빠라니...


폴라로이드의 가치는 지나치는 그 순간을 바로 현실로 인쇄해서 엉성한 품질 너머 선명한 기억으로 간직하는 감성에 있다. 망설이면 놓치는 기억 앞에 아까워할 이유가 없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두고두고 후회를 곱씹는다.




현아, 사는 동안 아이스크림을 늘 손에 쥐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어느 정도 먹으면 배탈이 나는 사람인지 스스로 알고 있으면 더 좋을 거야.


찬란한 순간은 계속되지 않아. 삶은 대체로 건조하거나 고달프고 가끔 행복감을 느끼는 걸로 만족해야 할 거야. 촉촉한 그 순간을 기억에 남기는 방법은 기록하고 때로 끄집어내는 수밖에 없고, 그건 목마른 어느 날 기적처럼 촉촉하게 목을 축여줄 거야.


아이스크림을 저장해 두기만 하면서 그걸 보고 만족하는 삶도 있어. 하지만 그게 행복감을 지속적으로 주진 않아.


장면에 셔터 누르는 일을 다른 이유로 망설이진 않기를! 어쩌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눈앞에 왔을 때 배탈이 나지 않을 만큼 절제하되 바로 맛보는 걸 주저하지도 않기를.


우물쭈물하는 사이 아이스크림은 곧 녹아 버리고 마니까.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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