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환 그 이후, 나의 직장생활 28년 (5)

신입대리 중국을 누비다(1)

by 리본안

그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마가복음 8장 1절)


" 혹시 O병장님 아니십니까?"

중국행 비행기 터미널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북적거렸습니다.

중국 청도(앞으로 중국의 많은 지명들은 그 당시 분위기에 따라 한국발음으로 표기하고자 합니다.)로 가는 비행기 개찰구 앞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맞은편 서너 뒤에 유달리 덩치가 크고, 얼굴이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혹시나 하여 자세히 바라보니 저와 같은 소대에 있었던 3개월 고참이었습니다.

" R병장 아냐?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

세기말이라고 떠들썩했던 1900년대도 이미 저물었고,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어느덧 5개월이 지나가던 시점에 저는 가장 친했던 군대 고참 4년 만에 만났습니다.

당시 저는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아 군대를 한참 뒤에 갔었습니다. 고참은 학교에서 운동(데모)을 좀 과격하게 하다가 군대로 끌려 들어왔는데, 나이가 많다는 공통점 때문에 저희는 아주 막역하게 지냈습니다.

그 고참은 중국어가 전공이, 한참 중국이 시장을 개방하여 투자를 유치하고 있던 시절에 일치감치 중국에 들어가 사업을 시작한 모양이었습니다.

"야, 중국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다들 중국사람인 줄 안다."

웃으면서 얘기하는 고참의 얼굴을 새삼 다시 보니, 눈이 크고 얼굴도 둥글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어떻게 그 큰 중국땅에서 하필 출장지가 청도야? 물론 청도는 세계에서 LA 다음으로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동네다. 거기서는 굳이 중국어를 몰라도 사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야. 청도에 있는 동안 한번 전화해라. 어차피 삐까번쩍하는 데는 다 가봤을 거고, 내가 중국의 가장 서민적인(?) 곳을 안내해 주지"

이때 사실 이 양반이 대단한 술고래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당시 청도에는 주말까지 머물러야 했고, 당연히 토요일에 그 고참에게 연락을 하여 그렇게 서민적인 것을 즐겼습니다. 그때 중국은 술에 관한 한 대단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도수 높은 중국술을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두병을 다 비우고, 극히 서민적인 장소에서 싼 맥주를 들이켠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제 기억상 가장 심한 숙취에 시달려, 밤새도록 머리를 깨는 듯한 두통에 시달렸고, 계속해서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다 게워내야 했습니다. 수도 없이 XX을 내뱉어내면서 말입니다.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X다."


양반이야 중국어 전공이라 전공을 살려서 중국을 뻔질나게 돌아다녔다지만, 화학을 전공한 이과생이 어떻게 중국을 그것도 2년 동안 뻔질나게 들락날락하게 되었을까요?

왔다 갔다 하는 시간들을 다 빼더라도, 중국에 체류한 기간만 다 합치면 족히 6개월은 넘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가 한 장소에 3일 이상 머무르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중국 내의 수십 개의 지역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의 최북단인 흑룡강성으로부터 최남단인 광동성까지 해안의 대도시를 따라 남북을 횡단하였고, 횡으로는 내륙의 중심지인 사천성 성도까지 이르는 방대한 여정이었습니다. 함께 통역으로 동행하였던 중국사무소의 조선족 여직원은 아마 중국사람조차도 R대리님처럼 중국 전역을 돌아다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구총각시절이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생활하면 나갈 수밖에 없는 생활비는 그대로 통장에 쌓이게 되었고, 중국 여행동안 출장 수당이 쌓여서 한 두 달 만에 약 백만 정도가 통장으로 추가로 들어왔습니다.

입사한 3년밖에 되지 않았던 젊은 연구소 직원에게 어떻게 이런 팔자 좋은 호사가 일어난 것일까요?


"아 자네가 그 ROO 씨인가?"

저를 부르신 T이사님은 50대 중반에 저희 회사에 새롭게 입사하신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나이 50이 넘어 일반회사에 이사로 입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농촌진흥청인가 에서 정년 퇴임을 하셨다고 하는데, 다시 직장생활을 그것도 일반회사에서 시작하시기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분의 형님이 금융감독원장이시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금융감독원장은 제계의 대통령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느 회사든 이 막강한 줄이 온다는 것을 마다할 수는 없었을 터이고 일단 곡물을 다루는 가장 큰 회사였던 우리 회사에 지원하자마자 바로 합격통보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사업부는 세계 최대 곡물을 다루기에 농작물을 전공하신 이사님은 당연히 우리에게 파견되셨고 우리 본부장님께서는 이분에게 맞는 업무를 일부러 만들어서(?) 주어야 했습니다.


" 잘 부탁하네. 이번에 중국에 출장 가서 옥수수 관련 조사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혼자 하기 뭐해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자네가 가장 적임자라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 응 사실 내가 이 사업부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그래서 이 사업부를 잘 아는 기술자가 필요한데, 수소문해 보니 L대리가 제일 스마트하다고 해서 본부장님에게 L대리를 데려가겠다고 했지"

순간적으로 기술팀에 있는 L대리가 떠올랐습니다. 사업부에서 가장 촉망받고 있고 한참 조직에서의 역할이 큰 직급에 있었습니다.

'그 선배가 언제 끝날 지 모르고, 출장 목적도 애매한 이 장기 출장에 따라가려고 할까? 안 그래도 출세의 메인 라인에 잘 서서 잘 나가고 있는데 이 이사님을 어떻게 믿고?'

아무리 능력이 줄충해도 회사는 조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한번 라인을 이탈하게 되면 조직은 어떻게든 일을 해야 해서 차선책인 인원으로 채워지고 그러게 되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나중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득불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회사의 생리입니다.

이런 일에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L대리가 근본도 없는 외부인과 임시적인 조직에서 일하겠다고 나설 리 만무합니다.

"아 글쎄 그랬더니 본부장님이 펄쩍 뛰시던데? 그 친구는 핵심인력이라 자리를 비우기 곤란하다고.

그래서 어떡해? 그럼 L대리에 비견할 만한 사람 하나 붙여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본부장님이 그러시데... 마침 L대리에 못지않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빌려줄 수 있다고..."


그 당시 옥수수를 수입하고 있는 우리 회사는 몇 가지 과제에 당면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소비자들은 Non-GMO (Gene Modified Organizm), 즉 유전자가 조작된 농산물이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 있다고 하여 GMO조작된 옥수수 구매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고, 한국에서도 이러한 움직임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최대 생산지인 옥수수는 당연히 GMO기술의 첨단에 있던 미국곡물회사에 의해 종자가 개량되어 왔으니 GMO의 대표적인 곡물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석유대체 에너지로 알코올을 생산하는 주원료로 옥수수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미국산 옥수수 가격은 환경정책에 따라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경우가 있었고, 작황에 따라 옥수수 가격의 변동이 매우 심한 편이었습니다.

따라서 옥수수 생산량이 세계 2위였던 중국이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중국산 옥수수는 대부분 Non-GMO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수입의 다각화를 전제로 할 때 중국산 옥수수를 수입하는 방안에 대하여 밀도 깊은 조사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중국은 당시 한참 시장개방정책을 추구하여 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최대 시장이 될 전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회사도 다른 사업부에서 이미 중국에 지사와 공장을 세웠었고, 우리 사업본부도 중국에 공장을 세워 중국시장을 공략하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이사님을 잘 활용하여 중국시장의 원료와 소비시장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고, 이사님의 수행비서로서 젊은 친구 하나를 붙여줘야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업본부 성격상 신제품 연구가 급하지 않으니 연구소인력을 차출하는 것이 가장 만만하였고, 선임 대리급들은 결혼을 하였거나, 이미 나름대로 연구소 내에서 맡은 역할이 있었기에, 당분간 빼도 전혀 조직에 영향이 없는 한 사람을 찾다 보니 제가 눈에 띈 듯합니다.

그대로 열심히 일해서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니라, 조직에 딱히 없어도 되는 존재감으로 인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거대한 해외 출장길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조사는 회사에서는 그다지 열매(결과)가 없는 이사님을 위한 선심성 업무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업무를 통해 저는 연구소에서 공장 관련 업무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회사의 가장 큰 프로젝트였던 서울과 부산의 공장을 군산으로 이전하는 과업에 참여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경력으로 인하여 한 회사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회사를 이직할 수 있는 스펙을 쌓은 첫걸음이 되었으니 이 중국 출장기회는 저의 미래를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여행은 평범한 회사원이 경험할 수 없는 방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글의 이야깃거리를 풍부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신 듯합니다.


서두가 길었네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중국 개방 초창기에 경험한 장기 전국적인 중국 여행(출장이 아니라) 중 발생한 재미있고 유익한 부분들만 골라서 나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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