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텃세 말고 텃새
어딜 가나 '텃세'가 있다고들 한다.
'텃세'의 본래 뜻은 '터를 빌리고 내는 세'이지만, '텃세 부린다'라는 표현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여기서 '텃세'의 의미는 '먼저 온 사람이 뒤에 온 사람에게 가지는 특권 의식' 또는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 '텃세부림'을 사실은 나도 여러 번 당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거다. 전학 간 학교에서 그 반의 실세인 여자 부반장은 이유 없이
나를 배척했고 반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전 학교에선 한 가닥 하던 나였지만 별 뾰족한 수 없이 묵묵히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난다.
결국 부모님의 일 때문에 철새처럼 원래 학교로 돌아가긴 했지만. 퍽 서글픈 경험이었다.
내가 처음 수영장에 다닐 거란 다짐을 말했을 때, 수영장에 꽤 오래 다니고 있던 언니가 말했다.
"수영장 텃세 장난 아니다. 샤워기도 막 자기 자리가 있는 거처럼 비키라고 하고,
빨리 하라고 엄청 눈치 주고~ 그래~."
나는 같은 돈 내고 다니면서 텃세가 웬 말인가 싶으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다.
'아니, 내가 또 경우가 아닌 꼴은 못 보는데... 어쩌지?' 싶은 거다.
첫날 살짝 긴장한 상태로 수영장에 갔었다.
1화에도 나오듯이 텃세는커녕 도움의 손길이 더 많았다.
정말 간혹 내가 씻고 있는데 말도 없이 자기 세면도구를 턱 놓고 옆에 서서 내가 빨리 하길
독촉하는 무례한 할머니들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수영장에선 그 언니가 걱정하던 그런 텃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텃세' 아닌 '텃새'는 있었다.
물론 수영장 안에 까치나 참새가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텃새처럼 주야장천 초급반에 머물러 있는 회원을 말하는 거다.
우리의 반장님, 쥐잉 할머니가 그 대표적 예지만
사실 나도 예비 텃새다.
초급반에서 수영을 시작한 지 벌써 7개월이 지났다.
물론 한 달에 12회인데 거기서 늘 3회 정도는 빠졌으니
횟수로 치면 63일 정도 배운 격이지만
명색이 7개월인데 아직도 초급에 있으니 진도가 느린 편인 건 확실하다.
이러다 나도 텃새가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가 되는 요즘이다.
(명색이 1등 자리인데 말이다.)
놀라운 건,
우리 수영장엔 철새도 있다는 거다.
역시 오리나 기러기류 새가 수영장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철새처럼 철만 되면 오는 회원이 있다.
그만뒀나 싶으면 갑자기 며칠 연달아 나오다가
또 사라졌다가 또 한 달 정도 있다가 나타나곤 한다.
살짝 기분이 상하는 건 그 철새는 느닷없이 나타나
내 둥지 같은 1등 자리를 채간다는 거다.
실력은 그다지 나보다 좋은지 모르겠는데 경력자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1번 자리에 선다.
우리 초급반 회원들은 성실하고 노력파인 분들이 많다.
그래서 다들 조금 힘들어도 속도감 있게 연달아 연습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철새 언니는 호랑이 쌤이 출발하라는데도
"아~ 나 못 가. 나 배 째~"라고 버티는 거다.

쌤이 편해도 우리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데 무례한 말투가 듣기 불편했다.
거기다 연습에 방해가 되니 살짝 미운 맘이 올라왔다.
자꾸 쉬면 폐활량이 늘지 않아 중급반으로 올라가기가 더 힘들어 진다.
다른 언니들의 표정을 순식간에 스캔한 결과 다들 나와 같은 맘인 게 확실했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외쳤다.
'아 저럴 거면 그냥 오지 말지...'
아뿔싸,
이 속마음이 밖으로 표출되면 그게 바로 텃세이겠구나 싶어 화들짝 놀랐다.
익숙한 멤버들끼리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걸 편해하고
새로운 사람이 끼었을 때 생기는 불편함을 내색하며 배척하는 거, 그게 바로 텃세 아니던가!
철새 언니는 새 멤버라 하기도 애매하고 내가 겉으로 어떤 표현을 하진 않지만,
어차피 호랑이쌤 호통에 곧 출발하게 되고 나는 1등 자리 따위에 솔직히 크게 욕심도 없다.
그러니 괜히 철새 언니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 거다.
내가 언젠가부터 독서와 독서모임과 글쓰기 예찬론자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런 거다.
책을 읽으면서 책 속 인물이나 화자를 통해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대리 경험할 수 있고,
독서모임을 통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확장하고 나를 성찰할 수 있게 된다는 거.
이 얼마나 매력적인 과정인가?
이제 나는 철새언니를 철저하게 중립적으로 대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텃세를 부리지 않으니,
텃새가 안 될 거란 비논리적인 결론으로 글을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