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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정했다! -8화

탄핵

by 하다

수영을 시작한 지 7개월이 지나고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시작은 맥주병만 면하자는 다짐에서였다.

물을 싫어하는 내가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비상시에 내 몸 하나는 내가 건사해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던 것이다.


나는 머리가 물속에 들어가면 정신을 못 차리니

진짜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십중팔구 미친 듯이 허우적대다가 제풀에 지쳐 죽을 판이었다.

최소한의 생존 수영이라도 배워두자고 시작했던 수영을

내가 7개월이 넘도록 하고 있을 줄이야!

나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요즘이다.



호랑이쌤은 초급반 회원이 너무 많아지자

우리를 빨리 중급반으로 올려 치워 버릴 셈인지

쉴틈을 주지 않고 몇 바퀴씩 돌린다.

이제는 쉴 때가 됐다 싶은데 호랑이쌤은 외쳤다.


"한 바퀴 더!"


나뿐만 아니라 다들 너무 힘들어 보여 나는 호랑이쌤에게 쉴 때가 되었음을 어필했다.

물론 씨도 안 먹힐 줄은 알았지만, 평소 군소리 없이 하던 나였으니

그래도 한 템포 쉬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코딱지만 한 기대를 가지고서 물었다.


"쌤, 저 입술 시퍼렇지 않아요?"(비실비실 웃으며)


"입술? 아주 너~~~~~~무 말짱해!"(꿈도 꾸지 말라는 듯)


눼눼~ 내가 잘못했지. 호랑이선생님한테 감히 그런 기대를 하다니!

눼눼~ 갑니다 가요.



최근 배운 제자리에서 살짝 점프해서 벽을 차고 스타트하는 동작에 이어 한 팔 접영으로 3바퀴를 돌았다.




그래서인지, 슬럼프인지 요즘 부쩍 집을 나서 수영장에 가기까지 내적 갈등이 심각해졌다.

'게으름뱅이 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 이성적인 나'의 싸움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된다.



겨울에는 갑자기 내린 눈을 핑계로 쉬었다.

(사실은 그날 눈은 금방 그쳤고 도로는 제설작업이 잘 되어서 수영장에 가는 길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 나는 '안전이 최고'라고 합리화했었더랬다.)


또 하루는 가방까지 다 들고 아파트 현관까지 나가선 갑자기 꾸룩 거리는 뱃속 신호를 핑계로 쉬었다.

(화장실에 갔다 가면 어차피 늦을 테고 이 상태로 수영을 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합리화했었지.)


늦장 부리는 아이들이 욕실을 늦게까지 점령하고 있는 바람에 수영시간에 늦자 그냥 하루 쉬어버렸다.

(아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마음의 짐을 덜었다.)



7개월쯤 되면 습관처럼 수영장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어쩐지 갈수록 '게으름뱅이 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 이성적인 나의 싸움'은 격렬해지고 있다.

급기야 오늘 아침 격투에선 이렇다할 핑계도 없이 '게으름뱅이 나'가 이기고야 말았다.

지금 내 안은 무능한 '게으름뱅이 나'가 점령하고 계엄령이 선포한 거나 다름없다.

'피도 눈물도 없이 이성적인 나'가 지다니!

이러다 중급반이란 고지를 앞두고 쥐잉 할머니와 반장님과 함께

초급반 죽순이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저 무능하고 욕심만 가득한 '게으름뱅이 나'가 나를 뒤흔들면

수영을 취소해 버리는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도 모른다.(사실 요즘 그만 다닐까, 환불받을까 자꾸 고민하게 된다.) 빠른 시일 내에 탄핵해야 한다.



'게으름뱅이 나'는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게으름뱅이 말을 들으면 일부 편안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나'를 더 강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은 결국 수영을 하면서 얻는 긍정적인 피드백들을 강화하는 것일 테다.



강화물의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


어제보다 부드러워진 접영 발차기,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진 자유형,

처음보다 단단해진 허벅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들려주는 호랑이쌤의 칭찬,

그리고 무엇보다 밀어주고 당겨주는 초급반 언니, 동생들과의 유대!



늘 어서 와~

왜 이렇게 늦었어~

어제 왜 안 왔어!

혼난다~


해주는 나의 음파음파 동지들,

그들의 나의 가장 강력한 강화물이다.


다음 주부터는 100% 출석 도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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