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엄마'라는 이름을 얻었을 때만큼이나 책을 쓰고 '저자'라는 이름을 얻은 뒤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장 먼저, 좋은 독자로 거듭나기 위해 책과 마주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다른 '저자'나 책을 내고자 마음먹은 미래의 '저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작은 책방에서 하는 저자와의 만남이나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북토크 공지가 뜨면 일단 달력을 펼쳐 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가능하면 바로 신청을 하였다. 그전까지는 사실 한 번도 북토크에 간 적이 없었다.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시간이 나지 않았던 것도 있겠지만 그런 자리는 정말 작가의 열렬한 팬이거나 책 애호가만 가는 곳이라 여겼다.
한 권의 책이지만 누군가 나를 '작가'라고 불러 주었을 때 갑자기 머리에 전등이 켜지는 낯설지만 기분이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나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작가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작가로 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졌고, 작가의 열렬한 팬이나 엄청난 책 애호가는 아니지만 응원의 눈빛과 온기가 전해지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독립출판을 준비하던 6월부터 지금까지 다섯 명의 작가님을 만났다. 김재용 작가님, 은유 작가님, 김동식 작가님, 양지영 작가님, 김경희 작가다. 현장에서 작가의 눈빛이 내 앞을 스칠 때마다 눈을 맞추고, 열심히 받아 적기도 하고, 마지막엔 준비한 책에 사인을 받으며 좋은 책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작가도 있었지만 첫 책을 출판하고 북토크를 여는 작가도 있었다. 모든 작가들은 책에 사인을 하는 그 짧은 순간에 반짝이는 따스함을 나눠주었다. 그들이 느낄 감사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을 알게 되어서 그런지 그 순간 괜히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왠지 내가 낳은 아이의 나도 모르는 보배로움을 발견하고 진심을 담아 칭찬을 하는 이웃을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주제의 강연을 들어왔다. 하지만 온전히 집중하여 사람과 '만남'을 가졌던 적은 거의 없었다. 강연의 내용에 집중했지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만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글'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정말 특별했다. 책 속의 문장들로 한 번 만났지만 다시 어떤 문장은 더 깊이, 어떤 문장은 더 경쾌하게 나누는 시간들은 책이 나에게 말을 걸고 책이라는 생태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경험이 발상이 되고, 그 발상이 문장으로, 짜임새를 갖춘 글로 나아가는지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 구슬꿰기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정말 흥미로웠다.
백지와 반짝이는 커서 앞에서 긴 망설임, 분명히 더 나은 문장이 있는 것 같은데 풀리지 않은 문장에 커다란 고구마가 걸린 것 같아 움찔거렸던 손가락, 그나마 적어 두었던 몇 개의 문장을 끝내 글로 풀어내지 못하고 눌렀던 취소 버튼.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그 순간으로 얼른 돌아가서 그때 쓰지 못했던 문장들을 쓰고 싶고, 쓸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가 충전되었다.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 쓰고 읽고 고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문장을, 꾸준히, 무엇이든 쓰라고 이야기했다.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나 처음에는 정말 별로 였던 문장들도 읽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용납할 수 있는 글이 되어간다고 했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다시 내 안의 '작가'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지금, 바로, 여기서 쓰라고 말을 건다. 무엇이든 너의 이야기를 꾸준히 쓰라고 말한다.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발상으로 전환하고 문장으로 옮기라고 말한다.
독립출판을 하고 나서 '저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름표가 아니라 성실함이 그들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임을 깨닫는다. 나도 그들이 일러준 대로 성실하게 쓰고, 넓게 두루 살펴 읽으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