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에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 발병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예상보다 그 파급력이 말 그대로 어마무시했다. 시작된 지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마스크 부족사태를 일으키고 3개월이 지나지 않아 모든 일상을 마비시켰다.
오프라인이 일상인 사람들이 온라인이라는 익숙지 않은 환경으로 강제로 내몰리며 화상회의, 재택근무, 메타버스 출근 등 적응적으로 살 길을 찾아내고 있었고,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선택한 가장 무식하고 확실한 방법은 사람들의 이동과 접촉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이었다.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이례적인 전지구적인 선행조치였다.
모든 기준에 생존이 최우선하며 그로 인한 다음 곂의 생존, 즉 이 조치들로 인해 직접적으로 영향받는 산업과 직업에 있는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체 거리, 아니 집으로 내몰렸다.
내가 다니던 항공사 또한 더 이상 비행기가 뜨지 않으니, 국가기간산업에서 금세 무쓸모, 잉여덩어리 집합체가 되어 버렸다. 회사도 유지가 어려워 국가지원금을 타 쓰는 마당에 소속된 개개인의 케어는 논할 여유가 없었다. 매달의 월급을 걱정해야 했고 일주일 중 이틀을 쉬더니 이틀을 출근하고 나중에는 이마저도 없는 강제휴식이 주어졌다. 직장생활 8년간 주말 없이 쉼 없이 달려왔는데 하늘도 무심하지.
영끌해서 첫 집을 장만하며 여윳돈 하나 없이 월급에만 의존했던 시절이기에, 얼마 안 되는 모아둔 돈이 떨어지는 속도는 버는 시간에 반비례하게 순식간에 쪼그라들어갔다.
주변에서는 남의 속도 모르고 곧 끝날 거니 마음 비우고 이 시기를 즐기면서 쉬라고 조언했지만, 이 불편한 휴식을 마음 놓고 보낼 위인이 얼마나 될까. 스트레스를 핑계로 우울함을 이유로 그간 미뤄왔던 임신준비도 더 큰 핑계로 점점 더 미뤄졌다.
이런 답답함은 살면서 처음이다. 채용공고를 쥐 잡듯이 뒤지는 일이 일상인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쓰레기통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걸 알면서, 뒤지는 행위자체로 루틴을 만들고 위안을 얻으며 살아가던 와중에 하나의 빛이 눈에 들어왔다.
"게임회사 A, □□기획 경력직 채용"
쿠키 스토리.
20년 4월. 20년 지기 친구가 세상을 등졌다.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친구의 부모님을 통해, 그것도 사망한 지 1달이 훌쩍 지난 시점에 전화로 알게 되었다.
망할 놈의 코로나로 통제가 심해 광주에 있누 납골당을 바로 찾아가지도 못했다. 무더운 여름이 다되어서야 찾게 된 친구의 모습은 신발장 같은 칸막이에 놓인 사진 한 장이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