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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름 Mar 06. 2024

평범해지고 싶은 사람

그렇게 되길 바라며 포도알을 채우던 날들.


“꾸준히 약 먹다 보면 좋아질 거예요. 지금이라도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에게 주어진 약봉지는 하루 4개, 아침 점심 오후4시 자기 전. 출근하기 전 약을 먹으면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 것이 마치 아무 감정 없이 무슨 일이든 흘려보낼 수 있을 듯했다. 약기운이 약해지는 듯하면 다시 복용시간- 또 복용시간- 나의 하루는 약 복용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순환되어갔다.


감정이 없어진다는 건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일이었다. 내 하루하루가 마치 포도송이 같았다. 약과 함께 원 하나 그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렇게 30알을 채우면 다음 포도송이가 기다리고-


이렇게 포도 몇 송이나 채우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무슨 일 있어? 요새 왜 이렇게 말을 안 해-”


네? 아니요, 그냥 요새 좀 바빠서 그런가봐요, 피곤하기도 하고- 주말에 뭐하셨어요?, 애써 말을 돌리며 텀블러 가득 물을 채웠다. 포도가 4송이를 지나 5송이로 넘어갔을 때 즈음 알았다. 감정이 없어진다는 건 생각보다 별 것 아니지만 가면을 써야 하는 상황이 자주 생긴다는 걸. 나는 어느샌가 기쁨을 잊었다. 나쁘다거나 슬프다거나 하진 않았다. 고통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기쁜 척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저 업무시작 전 탕비실에서, 점심시간에, 중간중간에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말하고-듣고-맞장구치며 웃어주면 되었다. 그것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것뿐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점심을 먹지 않게 되었다. 밥 대신 휴게실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야만 오후를 겨우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아요 - 이 짧은 대답이 힘겨워진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괜찮다고 하는 게 버겁다니. 내가 세상 제일 나쁜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렇지만, 뭐 별 수 있을까. 나는 오늘도 포도알을 그려야 하는 사람인데- 오늘 하루를 살아내면 겨우 동그라미 하나 얻는, 그런 사람인데.


세상 제일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내 자리 번호표가 늘어날 때마다 손에 땀이 났다. 머리가 아파왔고 입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멎을 것 같았다. 그게 공황장애예요- 맞아, 선생님이 그랬지. 이상한 게 아니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서랍 한구석 비상약을 가득 넣어놓고 민원인이 없는 틈에 물을 마시는 척 한알을 삼킨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 치부를 드러내느니 그냥 죽는 게 나았다. 내가 죽고 싶지 않대도 죽을만큼 힘든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 과장님과의 면담. 그것들을 줄줄이 묶어내면 내 꼬리표 완성-! 정말 최악이다.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게 내 세상.


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느 날 할머니가 은행 위치를 물어왔다.계단 타고 올라가셔서 통로 나가시면 본관에 있어요- 왜 안내판을 어렵게 만들어 본인을 계단 올라가게 만드냐며 신경질을 냈다. 별 것 아닌 민원이었다. 일상처럼 일어나는 일이었다. 대답하려고 하는데- 목구멍이 턱 막혀있는 거다. 어? 그러더니 갑자기 팔이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오고 다리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세상 모든 소리는 나에게만 음량을 최대치로 올려놓은 듯, 찌이잉 소리를 내며 귓속을 파고들었다. 약. 약 먹으면 괜찮아질 거다. 서랍을 열고 약을 물 없이 삼켰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나를 도와주러 온 직원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그리고 새하얘졌다.-


휴게실 소파에서 눈을 떴다.정말, 죽고싶었다. 알량한 자존심 한 가닥이 잘게잘게 썰려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과장님한테 얘기했으니까 나아질 때까지 병가내고 쉬어요- 일은 걱정하지 말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없는 시간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내 일을 모두 맡아야 하고 그래서 접수대 보직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휴가는 쓰지 않는다는 걸. 나는 괜찮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게 내 세상의 암묵적 규칙이다-

그런데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진다. 목구멍 속에서 괜찮다는 말이 다시 삼켜진다. 먹혀들어간다.


괜찮지 않다.



[저 괜찮지 않아요. 출근해서 걷는 것도 웃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괜찮지가 않아요. 내 앞으로 다가오는 민원인이 어떤 모습이든 어떤 용건이든 두렵고 무서워요. 그리고 무서워하는 제가, 괜찮지가 않아요.]


“이 정도면 심각해요. 오래 쉴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휴직이라던지.”


꼭 휴직한다고 이야기하세요- 병원에서 진단서를 뗐다. 진단서를 내면 3달까지 병가처리가 가능했고 휴직원을 내면 그 이상도 쉴 수 있었다. 어쩌지- 진단서가 담긴 봉투를 한참 만지작거리다 꺼내어 속으로 읽어본다.


상기 환자분 우울,불면,예기불안 및 공황의 반복등으로 금일 정신과적 평가상 증상악화가 뚜렷하여 향후 부정기간(최소6개월 이상)의 치료 개입 및 안정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문장으로 맞닥트린 나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서무계로 걸음을 옮겼다.


저- 3일만 병가내고 복귀해도 될까요?



그것이 내가 나에게 허용해 줄 수 있는 보살핌의 기간.



네? 진단서 받아가서 3일 쉬고 복귀했다고요?

선생님이 당황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제가 봤을 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요. 제발 본인을 너무 혹사시키지 마세요.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누가봐도 쉬어야 되는 몸상태잖아요.


네. 그래도 3일 쉬었더니 괜찮아졌어요. 어차피 새해되면 자리도 바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보려고요. 자리만 바뀌면 다 나아질 거예요. 민원업무 스트레스만 없어지면- 나아질 거예요.


그렇게 믿어요.


어느덧 여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고 포도부자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 민원대를 벗어나게 되었다. 열흘 전부터 달력에 엑스표시를 그어가며 틈틈이 짐정리도 해가며, 디데이가 되자마자 곧장 짐을 옮길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감정 없는 하루의 순환 속에서 가끔 옅은 웃음도 새어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이제 민원업무가 아니니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약도 줄일 수 있겠죠?” 진료실에서도 처음 선생님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내년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남편 될 사람도 같은 직업을 가졌다. 내 세상 속 사람들은 대부분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을 했고 가족구성원이 셋 넷이 되었고 나도 당연히 그렇게 살고 싶었다. 당연히 그렇게 사는 것 이외에는 구경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길이 존재하고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나는 중간에 잠깐 다리가 부서져 보수공사를 하고 건너느라 딜레이 되었을 뿐, 보수공사를 손수 하느라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고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을 뿐, 그대로 길 따라 걸어가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 사람이 아닌 나는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2023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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