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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잔 Jul 31. 2024

기차 티켓을 어린아이용으로 잘못 끊었을 때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생긴 일

오래전부터 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러-우 전쟁으로 갈 수 없게 되었기에 그전에 다녀온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함께 타고 여행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나의 제안에 내 고등학교 친구들 K, A, L이 응했다. 그날로 우리는 카페에 모여 열차 티켓을 예매했고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떠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잘못 예매한 티켓 한 장이 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며칠을 보내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러 갔다. 외향적인 성향인 나와 K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 오픈된 침대칸인 3등석을 원했지만, 내향적인 성향의 A와 L은 그래도 러시아라 겁이 난다며 우리 4명만 들어갈 수 있는 2등석을 원했다. 고민을 하다가 결국 A와 L의 의견을 들어 2등석에 탑승하기로 했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다음에 또 올 핑계가 생긴 것이니 오히려 좋기도 했다. 2등석 칸은 우리끼리만 보낼 수 있어 고요하고 안락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기차가 덜커덕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설렘도 잠시, A가 말한다.


"우리 라면 먹을래?"


다들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각자의 가방에서 라면을 하나씩 꺼냈다. 들어오면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을 이미 확인해 두었기에 얼른 가서 물을 받아 왔고, 그렇게 우리는 출발하자마자 배를 채우는 것으로 기차 여정을 시작했다.


라면을 먹고 난 뒤 화장실도 구경을 하러 가 보았는데, 화장실 자체는 깨끗했지만 수도꼭지가 매우 불편하게 되어 있었다. 한 손으로 수도꼭지를 강하게 누르고 있어야 물이 나오는 구조였다. 알고 보니 기차 내에서 물을 아껴 쓰게 하려고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우리 열차 칸을 담당하는 차장 아줌마 Rosa도 있었다. 차장 아줌마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지만 기차에 대해 바디랭귀지로 많은 설명을 해 주었다. 차장 아줌마는 너무 친절했고, 우리가 본인의 딸 나이와 비슷하다며 딸처럼 대해주었다. 차장 아줌마는 우리에게만 정차역마다 몇 분 동안 멈춰있는지 나와있는 표를 주기도 했다.


얼마 후 30분가량 쉬는 정차역에 멈췄고 우리는 잠시 바람을 쐬러 기차에서 내렸다. 정차역에서 러시아인들이 다양한 음식을 팔고 있었다. 멀리 갈 엄두는 나지 않았기에 바로 앞에 있던 할머니로부터 러시아 스타일의 빵과 만두를 샀다. 기차에 가지고 들어와 맛을 보는데 만두 속에는 감자가 들어있었고 맛은 꽤 괜찮았다. 빵은 이름 모를 빵과 소시지빵을 샀는데, 이름 모를 빵에는 감자가 들어있었고 소시지 빵에는 감자가 들어있었다. 감자가 어쩌면 그 지역 특산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끼리 모여서 떠들다가 각자의 침대로 흩어져 책도 좀 읽고 영화도 보다가 달콤한 낮잠에 빠져드는 일을 반복했다. 기차를 여기저기 쏘다니며 식당 칸에서 밥을 먹어보기도 하고, 맥주를 마셔보기도 했으며 다양한 러시아 사람들과 여행하던 외국인들을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기차 안에서의 시간이 전혀 지겹지 않았다.




기차에서의 둘째 날 오후, 그렇게 또 우리의 방에서 한량처럼 누워있는데 갑자기 차장 아줌마가 사색이 되어 우리 방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우리 방에 들어와서는 문을 걸어 잠구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영어가 안 되니 역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대략적으로 알아들은 바디랭귀지에 의하면, 우리가 기차 티켓을 잘못 발권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예매한 네 장의 티켓 중 한 장이 어린아이용 티켓이었던 것이다.


차장 아줌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 차에 높은 사람이 타 있는데, 그 사람이 좀 전에 지나가면서 동양인 어린애 어디에 있냐고 물어봤어. 내가 너네 지금 자고 있다고 말 하긴 했는데, 들키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해. 너네 어차피 내일 내릴 테니까 때까지만 문 꼭 걸어 잠그고 누가 두드려도 절대 어주지 마. 최대한 자는 척만 하고 있어."


물론 저 이야기를 다 손짓발짓으로 말이다.


사실 우리가 한국에서 표를 살 때 한 좌석만 가격이 저렴하길래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래도 저렴하게 산 것이니 기분 좋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게 어린아이용 티켓이어서 그랬을 줄이야. 우리를 생각해서 말해주는 차장 아줌마에게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말 그대로 낯선 땅에서 온 여자애들이었을 뿐이라 그저 벌금을 내게 하면 그만이었을 텐데, 우리를 정말 딸처럼 생각해 주고 우리가 머무는 내내 도와줬으니.


그때부터 차장 아줌마는 우리에게 차장엄마가 되었다.

 



기차에서 내릴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다행히 높은 사람에게 잘못 발권한 사실을 들키지 않았다. 차장엄마에게 우리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곳에서 러시아어 회화책에 의존해 편지를 썼다. "당신은 우리의 러시아 엄마예요. 고마워요"라고 쓰고 싶었지만 우리의 한계는 '당신, 우리, 러시아인, 엄마, 고마워요'였다.  


그렇게 우리는 편지와 함께 한국에서 가져온 김, 캐릭터 양말, 초코파이 등의 선물을 차장엄마에게 주었다. 차장엄마는 너무 좋아하면서 우리를 한 명 한 명 꼭 안아주셨다. 차장엄마의 품이, 그리고 그 국경을 뛰어넘는 따스한 마음이 그 어느 누구의 품보다도 애틋했다.


우리에게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그 차장엄마의 따스함으로 평생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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