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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잔 Aug 18. 2024

주택만 있는 길거리에서 배탈이 났다

L.A에서 생긴 일-Part 3

나에게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 여행지에 도착한 직후나 혹은 여행을 다녀온 뒤에 한국에서 꼭 장염에 한 번씩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L.A도 마찬가지였다. 깨끗한 곳인 데다가 내가 수돗물을 마시는 것도 아닌지라 크게 물갈이를 할 만한 곳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매번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 것일까. 라오스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홍콩에서도, 유럽에서도 정말 한 번도 빠짐없이 항상 그랬다. 나에게는 항상 악몽과도 같은 징크스였다.


L.A에서 길을 걷고 있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묵었던 숙소는 L.A 주택들이 모여있는 거리였다. 마트를 가려해도 20분 이상은 족히 걸어야 하는 곳이었고 와 K는 운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돈 없는 학생들이었기에 30분 거리 정도는 걸어 다녀야 마땅했다. 그렇게 숙소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CVS' 마트에 도착했다. L.A에서 가장 유명한 마트 중 한 곳이었기에 구경을 슬슬 하려던 찰나, 그날도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느낌이 왔다. 단순한 급똥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 분명했다.


지난 이틀간 전혀 오지 않았던 신호였기에 이번엔 무사히 넘기나 했었는데. 대체 왜, 하필 그곳에서, 나에게 그분이 온 것일까. 아픈 배를 움켜잡고 직원에게 달려갔다. 그 달려가는 길에도 미국 드라마에서 본 건 있어서, 뭐라도 구매를 해야 화장실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 같았기에 물 하나를 들고 결제를 하며 불쌍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Is there any restroom here?(여기 화장실 있나요?)"

"No. There's no public restroom. (아니요. 공용 화장실은 없어요.)"


OMG. 내 불쌍한 표정은 보이지 않는 걸까. 물건을 사는 데도 공용 화장실은 없다며 안 알려 준다니. 혹시나 인종 차별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의 그의 무심한 태도를 보니 괜히 잘못도 없는 그 직원이 얄밉게 느껴졌다. 집까지는 족히 20분은 걸어가야 하는 상황. 내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고,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화장실을 가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던 한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를 움켜쥐고 마트를 나왔는데, 가는 길에 보이는 것이라곤 다들 똑같이 생긴 주택뿐이었다. 분명 좀 전에 이 길을 지나올 때는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꾸며져 있어 너무 귀엽다며 사진을 찍으며 행복하게 걷던 길이었는데, 아픈 배를 움켜쥐고 걸어가는 그 길은 으스스한 길목처럼 느껴졌다.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모텔에라도 들어가서 화장실을 쓸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서워서 못 들어갔다)


라오스에서 유사한 상황을 겪었던 적이 있었다. 이전 에피소드에 기록해 놓았겠지만, 그곳에서는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풀밭이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자연에 거름을 주었었다. 그러나 L.A에서는 대낮이었던 데다가 길거리에 있는 주택집 앞으로는 나름 깔끔한 콘크리트만 깔려 있어서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이상 노상방뇨가 불가능한 장소였다.


결국 일단 K를 따라 우리의 숙소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버를 탈까 고민했지만 놀랍게도 내 아픈 배보다 비싼 우버 가격이 더 두려웠다. 지금 돌이켜보면 멍청한 생각이지만 그만큼 물가가 비싼 L.A에서는 단돈 천 원이라도 꽤나 중요했었던 시절이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빠르게 가면 20분이면 충분했지만 나는 중간중간 주저앉아야만 했다. 빠르게 다리를 꼬며 괄약근에 힘을 주고 한 블록을 걷고 주저앉고, 다시금 같은 일을 반복하기를 5번 즈음한 것 같다. 주저앉을 때마다 나의 궁둥이를 뚫고 아이들이 나오려고 했다.


그렇게 수 차례 주저앉으며 가다 보면, 20분 거리가 어느새 30분이 되고 40분이 되는 기적을 맞이할 수 있다. K도 그런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주저앉은 나를 보며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같이 발을 동동 굴려주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40분이 지나 우리 숙소인 초록색 대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 집은 열쇠로 열어야 하는 문을 두세 개는 지나야 했기에 K가 먼저 달려가서 나를 위해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렇게 초인적인 힘으로 달려가 사랑스러운 변기에 앉았고 결국 나는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은 채 산(?)할 수 있었다.


도대체 L.A에서 차 없이 걸어야 하는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화장실을 가는 걸까? 마트에서 정말 인종차별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다른 사람들은 차 없이는 다니지 않기에 화장실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럴 때 역시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는 현지에 사는 지인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행히도 나는 아직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았다.


출발 할 때의 풀충전된 텐션과 주택만 가득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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