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나도록 맑은_2024.09.10
숨 좀 쉬고 싶었습니다
'이제 숨 좀 쉬자!'
강릉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던 딱 하나의 이유였다. 이제는 숨 좀 쉬며 살고 싶었다.
원하는 곳에 취업을 하기 위해 지난 2년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 첫 1년은 큰 기대없이 '맛보기'라 생각하고 임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도전을 시작할 때부터 왠지 모를 부담감이 나를 점점 에워쌌다. 주변에 '나 여기 갈거야!'를 떵떵거리며 외치다보면 열심히 하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내 포부를 이리저리 말하고 다녔던 기억이 나를 다시 움츠러들게 했다. 잘 지내냐, 요새 뭐하냐, 공부는 잘 되가냐는 작은 물음 하나에도 나는 시원스레 답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변의 지인들과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그러한 사소한 물음에 일일이 설명하고 답해낼 힘이 없었고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이런 걸 두고 소위 '잠수'라고 말하는 듯하다. 살면서 처음해봤던 잠수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물론 수면 위로 다시 나오는 방법을 터득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다.
아직 나는 수면 아래에서 유영하고 있다.
그렇게 준비했던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우연찮게 얻은 또 다른 기회에 열중했다. 생전 처음 비싼 돈 내고 개인 스피치 과외를 받으며 면접 준비도 했다. 75만원이라는 거액으로 효과를 볼 수 있을지를 떠나서 이만큼 투자하는 게 맞는건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내 안에서 치솟을 때 즈음, 선생님의 말이 나를 움직였다.
"나라면, 평생 직장일지도 모를 기회에 75만원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요."
맞다. 아무리 우연이라해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박한 기회에 75만원을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선생님과 전화를 끊고 거실에서 TV를 보던 엄마한테 갔다.
"엄마, 나...75만원만 빌려줘요. 스피치 학원이 75만원이래. 엄청 비싸긴 한데... 이렇게 배워두면 나중에라도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겠죠."
흔쾌히 알았다며 선뜻 75만원을 내어주시는 엄마에게 고맙기도 하면서 죄송스러웠다.
'나는 언제쯤 독립할 수 있을까?'
면접까지 끝내고, 9월 초에 있던 자격증 실기시험도 마쳤다. 이번 실기시험은 쉽게 나왔다고 생각이 들었고 드디어 마지막 급수까지 취득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정된 시험 일정들을 하나둘 마치고 나니, 비워진 나에겐 다시 '채움'과 '치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강릉행을 택했다. 언제나 그리웠고, 담뿍 느끼고 싶었던 깊은 바다내음이 맡고 싶었다.
강릉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행의 테마 1순위는 '치유'와 '여유' 였고, 차순위를 '글과 함께하는 여행'으로 잡았다. 무리하게 일정을 잡지 않고 나의 체력에 맞게 조정하고, 멍 때려도 좋으니 마음껏 현재의 감정을 녹여낼 것. 그리고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리느라 풀어내지 못했던 글꽃을 마음껏 풀어내는 시간을 가져볼 것. 딱 두 가지 테마를 설정하다보니 일정을 잡는 데 어렵지 않았다.
아직 못다 읽은 시집 한 권이 있다. 나태주 시인께서 가장 최근에 발간한 시집인데 남은 페이지를 마저 다 읽고 싶어서 주저없이 배낭 속에 넣었던 책이었다. 내가 나태주 시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편안함에서 온다. 어떤 작품은 읽다보면 생각이 많이 들게 하는 시가 있는 반면, 자연 속에서의 풀내음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나는 자연스러운 풀내음 같은 시를 참 좋아한다. 나태주 시인은 바로 그런 풀내음을 시속에 담아내시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언젠가 편안한 시를 쓰고 싶다 생각을 하게 된 계기도 나태주 시인의 시 때문이었다.
10시 02분은 강릉역에 도착한 시간. 보도블록 위로 캐리어를 달그락달그락 끌며 숙소로 향했다. 강릉은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날이었다. 처음엔 그냥 걷다가 햇빛이 조금씩 따가워져 양산을 꺼내들었다.
도보로 10분에서 13분 남짓 걷다보면 예약해둔 숙소에 다다른다. '더다온' 이라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사장님의 배려로 2박3일동안 편하게 지내라고 더 넓고 편한 1인실에 저렴한 가격으로 안내해주셨다. 2박에 15만원짜리 방을 예약했었는데 3만원만 더 추가해서 넓은 방을 이용할 수 있었다. 처음엔 망설였다. 숙소에 사실 그렇게 큰돈을 쓰고 싶진 않았어서. 그렇지만 숙소로 향하는 동안 맞은 햇빛의 세기를 느끼고 나니 그런 고민은 사라졌다.
‘에어컨 빵빵한 쾌적한 곳이 필요해!’
아직 체크인 시간 전이라 리셉션에 위치한 캐비닛에 캐리어와 자질구레한 짐을 두고 움직였다. 숙소에서 강릉역 근처의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해서 버스를 타고 점심 먹을 장소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다다라 카드지갑을 찾는 손이 허공에 맴돌았다.
'아, 지갑을 가방에 두고 왔다!'
목에 두른 손수건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지만, 속으로 나지막이 비속어 하나를 읊조렸지만, 맑은 하늘을 보며 다시 숙소로 향했다.
'이 또한 오늘 나의 운명이니라!'
지갑을 다시 챙기고나니 다시 걸어가면 시간도 체력도 날릴 것 같아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역시, 시원한 택시가 최고다.
라면도 고즈넉하게 먹고 싶다면
평일의 이츠모라멘은 웨이팅이 없었다. 예전에 가족들이랑 갔을 때는 늦은 오후였고 주말이었어서 1시간 정도 기다렸었다. 9월 초중순 평일은 이래서 좋다. 여유롭게 즐길 수 있어서.
닭 육수가 베이스인 '카라이 토리라멘'을 먹기로 했다. 너무 느끼한 것보다 살짝 얼큰한 게 먹고 싶어서 맵기도 1단계로 도전했다. 맵찔이 치고는 나름 도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라면 맵기 정도의 1단계도 나의 땀샘을 활성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스프라이트 하나로 겨우 버텨냈던 것 같다. 오독오독 씹히는 숙주와 채소의 식감이 좋다. 계란 반숙은 일부러 늦게 터뜨렸다. 온전한 육수를 충분히 즐기고 싶어서 거의 다 먹어갈 때 즈음에 반으로 톡 갈라 터뜨렸다.
원래는 점심 후에 바로 허난설헌 생가터를 가고 싶었지만, 12시부터 13시까지 휴게시간이 있어서 배도 꺼뜨릴 겸 강문해변까지 걸어갔다. 소화시간이 느린 나인 걸 알기에 변경한 경로였다. 든든하게 먹어두어서 걷기에 적당했다.
복학했던 그해 강릉을 여행했던 추억도 되살릴 겸 그때의 사진구도를 찾고자 했었다. 진녹빛의 순두부마을 간판이 기억난다. 푸른 하늘과 대비되고 지나가던 연두빛 버스가 어우러지니 색감이 너무 예뻤다.
굿즈를 사는 게 아니라,
귀여움을 사는 겁니다만
강렬한 햇빛을 뚫고 '유리알유희' 라는 공예품 굿즈샵에 도착했다. 잠시 열도 식힐 겸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을 구경할 겸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커다란 헤어집게핀이었다. 때마침 좀 더 큰 집게핀으로 머리를 고정하고 싶었는데 바다물빛을 닮은 색으로 하나 덥석, 오늘부로 넌 내거다! 엽서 두 장과 떡메모지 두 개도 함께 샀다. 14,000원으로 나는 귀여움을 가득 구매했다.
내 기억엔 유리알유희 상점 앞엔 언제나 자전거가 있었고, 자전거 바구니엔 꽃이 채워져 있던 것 같았다. 저 바구니에 담긴 꽃은 아마도 '낭만' 이라는 이름의 꽃이 아닐까 한다.
'오늘도 예쁘게 놀다가렴'
깊---이 호흡하세요
유리알유희를 나와 대각선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강문해변이 보인다. 강릉바다가 강릉바다지 뭐긴 뭐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언컨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강문해면, 안목해변, 경포해변, 사근진해변 등등 하나의 바다가 나눠진 구역별로도 그들이 가진 물빛과 온도가 다르다.
나에게 강문해변은 강릉의 해변들 중 가장 선명하게 짙고 깊은 색감을 가지고 있다. 안목해변보다는 조금 더 시원하고 진한 느낌을 준다.
사진의 모서리에 한 가족이 걸려온다.
아기와 함께 나란히 앉아 해변을 바라보는 한 가족의 모습이 바다보다 더 예쁘다고 느껴졌다.
깅문해변은 하늘과의 경계가 조금 더 뚜렷하게 보여진다.
모래 위에 생긴 그림자가 선명하다. 물빛을 따라하고 싶은 치마를 입고 손가락으로 V를 지으며 그림자를 찍어본다. 발 밑으로 들어온 모래는 따갑지 않았다.
시선을 왼쪽으로, 왼쪽으로 옮겨서 발걸음도 같이 옮기다보면 모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넓은 스팟이 나온다. 그곳에 얕은 곳에서 유영하며 열기를 식히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나도 들어가고 싶다'
샌들이 젖으면 마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마음껏 들어가진 못하고 파도 근처만 걸어다녔다. 그러다 힘껏 부서져 내리는 한 파도에 우연히 발이 젖었다. 피할 새 없이 샌들 사이로 들어오는 바다가 꽤 시원했다. 그래, 이게 바다지!
발에 잔뜩 묻은 모래와 바닷물을 조금 털어내기 위해 벤치에 앉았다. 툭-툭 휴지로 바다를 털어낸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춤추는 해변을 바라본다. 모두들 점심을 먹고 있을 시간인 12시 경이라 더 조용했고 뜨거웠다.
유리알유희에서 산 엽서 중 한 장에는 돌고래가 있다. 예전에 이런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했었지만 난 유행을 거스를 줄 아는 사람이다. 꿋꿋하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 : )
돌고래를 바다가 아닌 하늘로 날게 해보고 싶었다. 자유로워지라고. 더 높이 날아올라도 된다고.
제일 좋아하는 강문해변을 뒤로 다시 걸었다. 허난설헌 생가터를 가는 길목에 높이 솟은 솟대가 보였다.
'안전한 여행길을 부탁드립니다' 속으로 솟대에게 부탁하며 스윽 지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