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hole-man_2024.09.10
숙소에서 더위에 달궈져 땀으로 가득한 몸에 미지근한 물을 끼얹고 나왔다. 몸이 더울 때 무작정 찬물로 샤워를 했다가는 더 더워지기 일쑤다. 우리의 몸은 항상성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데워진 몸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어버리면 몸을 다시 데우기 위해 몸이 더 열을 내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땀 흘리고 나서는 찬물이 아닌 미지근한 온도로 샤워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처음엔 몰랐는데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월화거리'가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와중에 보이는 하늘과 가로등이 참 예뻐서 신호가 바뀌기 전에 얼른 사진으로 남겼다. 귀여운 뭉게구름이 피어있는 날도 좋지만 한 점의 구름도 없이 본연의 하늘빛을 띠는 날들이 참 좋다. 주어진 사물들을 좀 더 차분히 바라보게 하는 매력 있는 하늘이다.
예, 단편영화 처음 봅니다.
교동철교 정류장에서 230번 버스를 타고 교동주유소에서 하차한 후 약 600m 정도를 걸어서 '무명극장'으로 향했다. 다양한 단편영화들을 상영하는 공간이었는데, 단편영화를 찾아서 본 적이 없었기에 이번 여행을 통해 꼭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네이버를 통해 16시 30분에 예약을 해 두었다.
생각보다 빠듯하게 출발했다. 예약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것 같아서 무명극장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가는 길은 퍽 오르막이어서 숨이 차올랐다.
“사장님, 제가 (헉헉) 지금 열심히 가고 (헉헉) 있는데요, 상영시간 10분 전에는 도착해야 되는 걸로 아는데, 제가 딱 맞춰 도착할 것 같아 (헉헉) 가지고요...”
친절하게도 사장님께서는
“아고, 괜찮습니다! 천천히 오셔도 돼요!”
라고 해주셨다. 그 말씀에 뛰던 걸음을 빠른 걸음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숨은 여전히 찼다.
처음엔 잘 못 찾았다. 길치인 탓도 있었지만 일반 주택가처럼 보이는 곳에 바로 '무명'이 있었다. 여기가 맞나 싶은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상적으로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현관을 열면 이중문이 하나 더 있는데, 이중문의 반투명한 창 뒤로 '와플이'의 모습이 비친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좋은 푸들 '와플이'가 마중 나와 두 발로 나를 반겨주었다. 너무 귀여워서 소리 지를 뻔했지만 와플이가 놀랄 것 같아서 꾹 삼켰다.
몹시 더워하며 땀 흘리는 나를 위해 사장님께서 에어컨을 더 빵빵하게 틀어주셨다.
“와플이는 카메라를 조금 무서워해요.”라는 말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며 와플이를 귀여워했겠지만, 귀여움에 내민 카메라가 이 작은 친구에겐 무서웠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눈에 더 많이 담고 잔잔히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엔 방방 뛰면서 손님을 반기던 와플이는 신기하게도 사장님이 업무를 보시거나 영화가 시작되면 조용히 자기 자리에 누웠다. 아직 전 타임 손님이 영화를 보시고 계셨기에 로비에서 기다리면서 무음 카메라로 조용히 와플이의 모습을 담았다. 와플이가 놀라지 않길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안온한 쉼이 되길 바랐다.
책꽂이에 책들도 꽤나 쌓여있다. 선반 위에 가지런히 혹은 사선으로 꽂힌 책들이 나열된 모습은 내게 기묘한 안정감을 주곤 한다. 녹빛이 보이진 않지만 왠지 애정하는 공원이나 숲에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
무명극장의 매력은 티켓에도 있다. 시간이 되면 사장님께서 종이로 된 티켓을 적어서 발급해 주신다. 내가 오늘 볼 영화는 '하프 어 맨(Half A Man)'이라는 영화였는데, 운 좋게도 이 영화가 이곳에서 처음 상영되는 해외영화라고 하셨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는 게 이런 거구나!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였는데 어렵게 다가오진 않을까 걱정반 설렘반으로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내가 관람한 시간대엔 아무도 없어서 단독으로 관람하는 행운을 맞았다. 편한 자리를 마음대로 골라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엔 암흑 같은 공간이라 혹시... 내 옆에 미지의 존재가 함께 할까 무섭기도 했지만, 영상이 틀어지고 이내 잊혀졌다.
약 22분 정도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 미리 사장님께 주문해 놓은 음료를 받고 카페처럼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나는 '무명 블렌드'라는 이름의 핸드드립 커피를 받아 들었다. 적당히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묵직함이 무명극장과 참 잘 어울렸다.
테이블 중앙에는 방명록과 필기구들이 놓여 있다. 방명록(7)을 집어 들고 오늘 나의 방문을 남겨본다. 펜들도 색깔별로 다양해서 꾸미기에도 좋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방명록에 진심으로 남겨둔 글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
처음 본 단편영화인 '하프 어 맨'은 걱정과 달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포로가 되어 숱한 고문으로 피폐해진 한 가장의 모습,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 큰 틀인 듯했다. 그 속에서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그려낸 담담하면서도 불안한 감정들도 함께 느껴졌다. 영상미와 색감이 좋아서 넉 놓고 보면 평범한 일상 같아 보이지만, 재차 들여다보았을 땐 다르게 전해지는 메시지들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넌지시 위로를 건네는 영화였던 것 같기도 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방명록을 쓰다 중간중간 널찍한 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을 향해 큰 호흡도 뱉어냈다. 후-
로비에서 와플이가 총총총 걸어 다니는 발소리가 들린다. 사장님이 다정하게 와플이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쭈뼛쭈뼛 나가본다. 와플이를 쓰다듬으며,
"와플이는 올해 몇 살이에요?"
"올해 4살이에요, 이제."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5살 아니면 4살일 거다!)
"오... 그렇구나? 아유, 귀엽다!"
대화의 마무리를 부드럽게 맺지 못한 채로 나는 와플이처럼 총총걸음으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횟집에서 혼자 회 먹는 용기
오후 5시 30분이 조금 안되었을 때, 사장님과 와플이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진한 여운을 들고서. 저녁시간보다 몇 분 이르게 움직여서 내일 일정을 위해 일찍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무명극장에 왔을 때 내렸던 교동주유소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신영극장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거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강릉 중앙시장'이 나온다. 대학교 때 한번, 가족들과도 한번 왔던 장소라 많이 익숙했다.
원래는 수요일에 지하어시장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수요일은 정기 휴무일이라 하루 앞당겨 오늘 회를 떠먹기로 했다. 지하어시장은 무척 한산했다. 성수기도 아니었고, 평일이다 보니 확실히 사람이 많진 않았다.
어시장을 조금 돌아다니다 어디로 들어갈지 갈피를 못 잡다가 뭔가 상냥해 보이는 사장님이 서 계시던 곳에 이끌려 들어간 가게였다. 가격이 그렇게 싸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더 돌아다니기에도 힘들어서 바로 들어갔다. 목표는 광어와 오징어!
꼬들꼬들한 식감이 입안에서 미처 날뛰었다. 특히 나는 이 집의 기름장이 정말 맛있었는데, 오징어와 광어회를 기름막장에 푹 찍고 깻잎에 싸 먹으면 극락이다. 거기에 질기다 싶을 때면 따라놓은 맥주 한잔을 들이켜면 금상첨화이다.
학생시절엔 '혼밥'이 참 어려웠었는데 휴학을 하며 혼자 유럽여행을 다녀온 이후부터는 부쩍 혼밥이 일상화가 된 듯하다. 여기 식당에서도 손님이 나 혼자뿐이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속도대로 천천히 꼭꼭 씹어 먹었다. 다 먹어갈 때 즈음에 손님 한 팀이 왔는데 왠지 괜히 반가웠다. 혼밥이 익숙해도 그럼에도 역시 조금은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인가 보다.
계산을 하고 나와 빵빵해진 배를 꺼뜨리기 위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노을 지는 하늘과 시장의 불빛들이 밤이 오려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인생, ‘내‘ 컷
시장에서 월화거리는 아주 근처였기에 저녁 산책 겸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뻥 뚫린 월화거리의 입구가 시원하다.
분주한 듯, 고요한 듯.
오늘의 내 모습을 남기고 싶어서 택한 곳은 '포토이즘'이었다. 혼자서 이런 네컷 사진을 찍어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마침 사람도 없어서 후다닥 들어갔다.
어색하지만, 다신 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내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
상의가 흰색인 것을 생각을 못하고 배경이 흰색인 곳에서 촬영을 해버렸다. 찍고 나니 얼굴이 동동 떠다니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늘의 내 모습은 그 어떤 것이든 괜찮다.
집에 돌아가면 포켓앨범에 꽂아둬야겠다. 사진인화를 해서 추억을 모아두는 취미가 있었는데 안 하게 된 지 오래인 것 같다. 사실 비용적인 부분이 컸다. 예전에는 장당 50원 미만이던 인화가격은 이제는 100원이 훌쩍 넘은 상태인 지금은, 그동안 모아둔 추억들을 한꺼번에 뽑으려면 꽤 많은 비용이 들 것 같아서다. 아쉽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업이 생기기까지는 인화할 사진을 엄선해 두어야겠다.
다정하게 걷는다는 것
사진을 찍고 나와서 월화거리를 따라 쭉 걸었다. 해질녂의 하늘은 물감을 풀어둔 듯 섞여 있었다. 화요일 저녁의 월화거리는 생각보다 더 한산했다. 잔잔한 거리를 유유히 걸었다. 속으로만 부르던 콧노래가 바깥으로 조금씩 새어 나온다. 그래도 아무도 모를 거다! : )
내 앞으로 외국인 커플 혹은 부부 한쌍이 걸어가고 있었다. 백팩을 메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한다‘는 단어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 목줄로 보이는 끈을 한 고양이가 벤치 위에서 누군가가 차려놓은 밥을 먹고 있었다. 그 앞의 어떤 아주머니께서 챙겨주신 듯 보였다. 반려묘의 생인지 거리의 묘생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배를 곯지 않게 하려는 따뜻한 의도가 느껴졌다.
’맛있게 배불리 먹으렴, 고양이야!‘
‘공원’이라는 장소를 퍽 좋아한다. 평소엔 동네 근처의 노적봉공원 정도를 공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유럽여행을 다녀온 뒤로 부쩍 공원에 관심이 많아졌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봤던 ‘사운드 오브 뮤직 파빌리온’ 잊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공원을 참 좋아하게 된 것이. 평온함을 넘어 자연 속의 고요함과 녹빛이 주는 따뜻함은 여전히 선명하다. 언젠가 꼭 다시 방문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내 인생 목표 중의 하나이다.
한 걸음에 호흡 한 번을 내뱉다 보면 잡념과 사념이 그동안은 덜어진다. 아니, 사실 생각은 똑-하고 덜어낼 수는 없지만 호흡과 함께 자연히 내뱉을 수 있게 된다.
‘날 또 찾아왔구나? 반가워, 잠시 머물다 가렴.’
다시 숙소 근처의 큰 사거리에 도달했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다시 카메라를 든다. 셔터를 누르자마자 신호가 바뀌었다.
조금 더 움직이니 손톱 같은 달이 떠올랐다.
‘오늘도 나의 밤을 잘 부탁해.’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고생한 몸에게 따뜻한 샤워와 쾌적한 에어컨 바람을 선물했다. 강렬한 햇빛 탓에 샌들을 신고 돌아다녔던 발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덩달아 목과 팔 부분도 빨갛다 못해 검붉어지기 직전이었다. 꽤나 따가웠는데 집에 돌아가면 알로에를 듬뿍 발라야겠다 생각했다.
숙소에서는 사장님 계정으로 넷플릭스를 볼 수 있었는데, 뭘 볼까 한참을 고르다 ‘나의 해방일지’를 선택했다. 꼭 보고 싶었지만 뭔가 무의식적으로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보게 되었다. 1화를 보는 순간, ‘아, 이걸 왜 이제야 봤을까’ 싶었다. 담담함을 담아낸 배우들의 연기와 작품의 메시지에 나도 덩달아 담담해지며 공감이 갔다. 여행하는 동안 5화 정도까지 봤던 것 같다. 남은 11화도 천천히 정주행을 해야겠다.
에어컨을 끄고 선풍기를 회전으로 돌려놓은 채 잠을 청해 본다. 내일은 새벽 일찍 출발해서 일출을 보러 갈 것이니까.
조금은 뒤척이며 밤을 청하였고 이내 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