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책상에 앉아 2학기 수업 계획을 세우다가 문득 깨달았다. 20??년 은퇴하면 더 이상 도덕과 교안을 짤 필요가 없겠구나. 33년간 매년 새 학기마다 교육과정을 분석하고, 단원별 목표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그동안 학생들에게는 "계획 없는 목표는 꿈에 불과하다",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실력이 늘어난다"라고 가르쳐놓고, 정작 내 은퇴 준비는 아무런 계획 없이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도 새로운 과목을 배우자. 과목명은 이제 더 이상 도덕, 윤리가 아닌 '슬기로운 은퇴생활'이다. 그런데 이 과목은 특이하다. 교안을 짜는 선생님도 나고, 수업을 듣는 학생도 나다. 내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배우는 셈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막막했다. 33년간 도덕·윤리만 가르쳐왔는데, 갑자기 재정 관리니 건강 관리니 하는 것들을 배워야 한다니. 마치 중학교 때 갑자기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라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건 '왜 배워야 하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목적이 명확하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다. 나에게 '슬기로운 은퇴생활'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했다. 앞으로 길게는 30-40년을 더 살아가야 하는데, 그 시간을 의미 있고 건강하게 보내고 싶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오히려 설레기 시작했다. 50대 중반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는 게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들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건 돈 공부였다. 그동안 월급쟁이로 살면서 돈 관리라고는 적금 넣고 보험료 내는 것 정도였다. 투자나 재테크는 남의 일 같았다. 하지만 은퇴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학연금과 개인연금을 받긴 하지만, 현재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걸 계산해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사학연금이 정확히 언제부터 얼마나 나오는지, 개인연금은 언제 받는 게 유리한지, 개인연금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하나씩 공부하고 있다.
돈 다음으로 중요한 건 건강이었다. 50대 중반이 되니까 확실히 몸의 변화가 느껴진다.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차고, 책을 오래 읽으면 눈이 피로하다. 예전엔 밤늦게 일해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무리하면 다음 날까지 피곤이 이어진다. 그동안은 "아직 젊다"는 착각 속에 살았는데, 은퇴를 앞두고 보니 건강 관리가 시급했다. 은퇴 후 20-30년을 건강하게 살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마음 건강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은퇴하면 '교사'라는 정체성을 잃게 되는데, 그때 오는 허전함이나 우울감을 어떻게 극복할지 미리 준비해야 한다. 요즘 명상이나 산책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학교 밖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이 과목의 중요한 부분이다. 33년간 주로 교육계 사람들과만 어울렸는데, 은퇴 후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50대 중반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하지만 용기를 내어 포크레인 자격증도 취득하고, 새롭게 지게차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일로 준비하면서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다. 배드민턴 동호회에도 가입해 나름 열심히 운동도 하고 있다. 민턴 클럽에서 다양한 직종의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학교에서 하는 대화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 있다. 교육 이야기가 아닌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며 웃고 떠드는 시간이 소중하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일상 속의 소통은 또 다른 어휘를 찾게 되고 학생들과의 문법이 아닌 또 다른 언어가 필요하기에 새롭고 신선하다.
33년간 쌓은 교직 경험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고민이었다. 단순히 추억으로만 간직하기에는 아까운 경험들이 많다. 그래서 이런 경험들을 콘텐츠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브런치에 올리는 은퇴일기, 교단 일기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 가끔 같은 현장의 젊은 교사들이 "공감한다", "도움이 된다"는 댓글을 달아주면 뿌듯하다. 교육 컨설팅에도 관심이 생겼다. 새로 부임하는 젊은 교사들에게 교실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보람되다. 앞으로 조금씩 은퇴 후 시작할 수 있도록 꾸준히 준비하며 자료를 모으고 있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롭지는 않다. 투자 공부를 하면서 손실을 보기도 하고, 운동을 하면서 무릎이 아파서 중단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실패들도 소중한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보라"고 가르쳤는데, 이제 내가 그 말을 실천하고 있다.
세네카는 "우리는 배우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배운다"고 했다. 은퇴를 앞두고 이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배움을 멈출 이유는 없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시기일 수도 있다.
'슬기로운 은퇴생활'이라는 과목을 공부하면서 내 정체성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33년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배우는 사람'이 되고 있다. 학생들에게 "선생님도 여러분과 함께 배우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제 정말로 그런 상황이 됐다. 하지만 이 변화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50대 중반에도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온라인에서도 은퇴 준비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은퇴 준비 카페에서 댓글을 통해 만난 분들과 카톡방을 만들어서 일상을 나누기도 한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서 금세 친해졌다. 이런 네트워크가 은퇴 후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도 여러 명이 모이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무엇보다 "나 혼자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안도감이 든다.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슬기로운 은퇴생활' 과목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마다 상황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니까,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준비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결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도 계속 배우고, 실천하고, 성찰하면서 나만의 은퇴 생활을 준비해나가려고 한다. 20??년 은퇴할 때쯤에는 이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성적보다는 진짜 '슬기로운 은퇴생활'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