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가리키는 물리적 시간, 즉 정량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질적 시간, 의미가 충만한 순간들을 말한다. 기회의 때, 결정적 순간, 깊이 있는 경험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33년간의 교직 생활을 돌아보면, 내 삶은 철저히 '루틴(routine)'에 지배당해 왔다. 오전 7시 30분 출근, 8시 30분 조회, 그리고 1교시부터 7교시까지 계속되는 수업, 방과 후 업무, 오후 4시 반 퇴근. 이런 패턴이 33년간 반복됐다. 주말에도 학교 업무, 교재 연구 등으로 바빴다. 방학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처럼 41조 연수와 각종 업무로 진짜 쉬는 날은 많지 않았다.
물론 이런 루틴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규칙적인 생활은 안정감을 주고, 예측 가능한 일상은 심리적 편안함을 제공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자체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매일매일이 똑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내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20??년 은퇴를 앞두고 있는 지금, 나는 새로운 종류의 시간을 꿈꾸고 있다. 크로노스에서 벗어나 카이로스로 살아가고 싶다. 매 순간이 의미 있고, 새로운 발견과 경험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얼마 전 방학이라 가능한 평일 오전 시간에 아내와 늦은 아침을 해결하러 스타벅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은퇴하신 것 같은 어르신들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분은 혼자 책을 읽고 있었고, 어떤 분은 노트북으로 뭔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분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실까?" 궁금했다. 나는 아직 학교 시간표에 묶여 있어서 평일 오전 카페에서 여유를 부릴 수 없지만, 은퇴 후에는 가능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됐다. 갑자기 시간표가 사라지면 뭘 해야 할지 모를 것 같다. 33년간 누군가 정해준 스케줄에 따라 살아왔는데, 갑자기 자유로워지면 오히려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루틴이 주는 안정감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완전한 자유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진짜 은퇴 후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카이로스적 삶이라고 해서 매 순간이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고, 일상적인 것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산책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33년간 똑같은 길로 출근했는데, 걸어서 천천히 보니까 전혀 다르더라. 계절에 따라 바뀌는 나무들, 아침마다 만나는 동네 사람들, 새로 생기는 가게들... 모든 게 새롭게 보였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은 수업 준비를 위한 책 읽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순전히 내 관심사를 위한 책들을 읽고 있다. 철학책, 역사책, 여행기 등등. 같은 책 읽기라도 목적이 다르니까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카이로스적 순간을 만든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분들과의 대화는 학교에서의 대화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다양한 직업,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은퇴 후 카이로스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자유로워진다고 해서 바로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주말을 활용해서 연습하고 있다. 토요일 오전에는 아무 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 순간의 기분에 따라 행동해 본다. 날씨가 좋으면 산에 가고, 비가 오면 집에서 책을 읽고, 나만의 새로운 행동을 즉흥적으로 고민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인터넷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몇 번 연습하다 보니 조금씩 요령이 생겼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순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방학 때도 의식적으로 시간을 다르게 써보고 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일들을 해본다. 오래 미뤄두었던 정리 정돈, 새로운 도시로의 여행 등등. 작은 변화라도 일상에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준다.
카이로스적 삶에는 혼자만의 시간도 중요하고,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도 중요하다. 루틴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개 혼자 있는 시간을 어색해한다. 항상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하지만 요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그냥 창밖을 바라보기, 아무 생각 없이 음악 듣기, 멍하니 하늘 보기... 이런 시간들이 의외로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준다.
반대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그동안은 업무적인 만남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만남들이 늘어났다. 목적 없이 그냥 수다 떨기, 함께 맛있는 거 먹기, 같이 걷기... 이런 시간들이 생각보다 소중하다.
하이데거는 "진정한 시간은 기다림 속에서 열린다"고 했다. 루틴에 매몰된 삶에서는 기다림의 여유가 없다. 모든 게 계획되고 예정되어 있어서 우연한 만남이나 뜻밖의 발견이 일어날 틈이 없다. 하지만 카이로스적 삶에서는 기다림과 여백이 있다. 그 여백 속에서 창의성이 싹튼다. 요즘 글쓰기를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 억지로 쥐어짜서 쓰는 글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 불현듯 떠오르는 영감을 따라 쓰는 글이 훨씬 생생하다.
브런치에 올리는 은퇴 일기도 그렇다. 미리 계획해서 쓰는 게 아니라, 어떤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 그 감정을 따라 써내려간다. 그래서 쓰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루틴의 세계는 완벽함을 추구한다. 계획대로 실행하고, 목표를 달성하고, 효율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세계는 불완전함을 포함한다.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면 점점 큰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나도 작은 것부터 바꿔나가고 있다.
평일 저녁 시간 활용법을 바꿨다. 그동안은 집에 오면 인터넷에 빠지거나 스마트폰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는 의식적으로 다른 활동을 해본다. 아내와 함께 산책하기, 은퇴 준비를 위한 다양한 책 읽기, 음악 듣기, 운동하기 등등.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실험들이 은퇴 후 삶을 위한 리허설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자유로워졌을 때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연습해 보는 것이다.
방학 때는 좀 더 본격적인 리허설을 해본다. 한 달 정도는 완전히 다른 리듬으로 살아본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기도 하고,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여행도 다르게 해보고 있다. 그동안은 꽉 짜인 일정으로 여행했는데, 이제는 여유로운 여행을 시도한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천천히 둘러보고, 계획에 없던 곳도 가보고, 현지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눠본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시간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누군가 정해준 시간표가 아니라, 내 마음과 몸의 리듬에 따라 시간을 사용하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33년간 크로노스의 시간에 길들여진 내가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갖는다. 20??년 은퇴 후에는 진짜 의미 있는 시간들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루틴에서 카이로스로의 전환. 그것은 단순히 시간 사용법의 변화가 아니라, 삶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다. 효율성에서 의미로, 성과에서 과정으로, 목적에서 즐거움으로. 이런 변화가 은퇴 후 삶을 진짜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