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re nothing without this suit..
얼마간 힘들었던 나를 일으켜 세워준 영화 속 한 마디가 있었다. 넋이 나간 채로,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눈은 썩은 동태 눈깔이 되어가지고서는 방향도 자신도 잃고서, 믿는 것도 의지할 것도 없어진 상태로 그저 용케도 살아져 있기는 하던 상태였던 때였다. 그 영화는 라라랜드가 아니였고, 이프온리도 아니였다. 그렇다고 멋진하루도 아니였고, 노팅힐도, 이터널선샤인도 아니였다. 무려 스파이더맨 홈커밍이였던 것이다.
네가 수트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면,
넌 더더욱 그걸 가져선 안돼.
나에게 말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던 그 대사를 떠올리는 것은 곧 나의 하루의 루틴이 되었다. 그리고 머물러 있던 심해에서 거슬러 올라오기 위해서 나는 두가지 커다란 원칙을 만들었다.
첫번째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였다. 하지만 그 생각을 거둔다고 해서 별달리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무언가가 바뀌지도 않았다. 기왕 계속해서 생을 이어가기로 하였다면 기계적으로라도 다음 스텝을 밟아나가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두번째는 "나아져 가는 것을 연기하는 것'이 되었다. 먼저, 마음 속 응어리를 풀기 위한답시고 계속해서 친구들을 괴롭히던 통화를 중단했다. 나 혼자인 시간이 두렵더라도 감내해보기로 했다. 어떤 밤, 고독이 밀려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때에는 첫번째 원칙을 되내였다. 어쩌다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도 했다. 조금 의지하던 술을 끊었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었다. 몇 키로씩을 걷기도 했고, 명상을 하기도 했다. 전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지만,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피아노도 배웠다. 싫어도 했고, 해야만 했다. 언젠가 내가 기적과 같이 보통의 사람이 된다면, 지난 시간이 어떤 형태로든 의미가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하루와 그 다음 날이 이어질 여명까지 계속되는 고통을 감내하며 억지로 나아갔다. 결국에는 오롯히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가족과 친구들이 알던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믿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겠지, 라면서 대화하고 웃었다.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던 마음의 병은 그렇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굉장히 놀라운 일이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다. 주변에 감사하고 내일이 기다려진다.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생겼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억지로 여러가지를 기계적으로 반복했을 뿐인데, 나는 전 방향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운동을 좋아한다. 피아노를 배우며 만난 사람들을 좋아한다. 고장난 나를 지켜준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나를 놓지않은 부모님께 감사한다. 어떤 누군가를 이해한다. 지난 시절의 못난 나를 반성하지만, 사랑한다. 철 없던 시절, 모든게 당연해서 감사할 줄도 모르고, 아파본 적 없어서 이해할 줄도 몰랐지만, 그리고 이런 걸 겪어야만 깨닫게 된다는 것이 삶이라는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감사하게도 잘 겪어내었다. 이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 이제 나는 잘 지내고 있다.
그 시기 즈음 증권사 프런트로의 이직을 확정지었다. 생각보다 원하는 포지션이 많이 열려있지도 않았고, 면접마다 생각보다 길어진 공백기간이 많이 부담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또 행운이 해결해주고 말았다. 늘상 모자란 능력에도 잘 해결되었던 인생의 큼지막한 일들을 돌이키면서 또 지겹게도 붙잡고 늘어져봤더니 얼떨결에 성공한 것이다. 언제인지 이제는 기억도 안 나지만, 목표라기엔 너무나 거대해서 꿈꾸지 않았던 IB에서의 새 출발을 말이다. 4번째 면접인 인사팀과 컴플라이언스팀 면접을 마치고서는 궁금한 점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구내식당 뷰가 그렇게 멋지다던데 한번 구경해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커피 한잔을 하면서 저 아래를 한참을 바라봤다. 감회가 새롭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언젠가 봤던 풍경 같기도 하고, 몇 년 전의 내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아니였는데, 이제 다시 나는 그럴싸한 놈이 된 것 같다. 꽤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예상이 안되는 일인가보다. 부침은 있었지만 이제 나는 어떤 고난이 나를 감싸더라도 기필코 이겨낼 경험이, 자신이 생겼다. 재밌네, 그래- 이래야 재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