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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ipark Feb 10. 2022

엄마

반복해서 부르면 먹먹해지는 이름


3년 전에 엄마가 아팠다.




그날을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거의 20년쯤 예전에 내가 중학생이었나 고등학생이었었나, 무튼 그즈음에 참 무서운 꿈을 꾸었던 기억이 있다. 정말 뜬금없는 엄마의 장례식, 엄마의 사인은 무려 소금을 많이 먹어서(?)였고 나는 뭐 그런 걸로 사람이 죽냐면서도 되려 내 온몸이 녹아내릴 만큼 울었다. 나는 슬픈 영화를 볼 때만은 곧잘 울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데, 그만큼 전력으로 울었던 적은 태어나서도 손에 꼽을 테다. 지칠 때까지 울다가 울다가 결국 새벽에 깨서는 눈물에 젖은 베개를 보고서야 꿈이란 걸 알았다. 그러고서도 감정의 폭풍우를 이겨내지 못하고 앉은 채 몇 분을 더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이게 이렇게나 아플 일이라면 평생을 전력으로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아주 강력한 진심으로 했다. 아마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무언가를 다짐했던 일일 거다.


우리 집은 IMF 즈음해서 크게 박살이 났다. 새 집에 이사 가고 나서 언젠가부터 부모님이 자주 싸웠던 것 같다. 어느 날에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왔더니 안방에 있던 브라운관 TV가 박살이 나 있었다. 그 전이나 이후로나 부모님이 싸우실 때 물건이 부서지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 데도 직감적으로 강도 같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초등학생의 나는 드디어 올게 왔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한동안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아빠는 나와 누나를 거실에 불러 앉히고는 미안하다며 우셨다. 아빠가 우는 것 역시 20년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한 번도 못 봤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우리 가족은 꽤 긴 암흑기를 보냈다. 10년 정도였던 것 같다.


부모님이 큰 마음을 먹고 장만했던 집을 팔고는 더 작은 집에 전세를 살았다. 당시에는 왜 자꾸 이사를 가나 싶었는데 빚이 많아서 집을 내놨던 거였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아르바이트를 다니셨다. 그러면서 가끔은 동네에 있던 와인 숙성 삼겹살 블라블라에 누나랑 나를 데리고 갔다. 엄마는 일하면서 먹을 거라며 고기 몇 점을 채 드시질 않았다. 나는 다 같이 배불리 먹을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쯤을 충분히 아는 나이였지만 삼겹살이 너무 좋아서 그냥 모르는 척 진심으로 열심히 먹었다. 밥을 먹고는 나는 학원으로 갔고 엄마는 일을 하러 갔다. 엄마는 터널 같은 10년을 지나서도 얼마간은 더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시간이 아깝다며 아주 사소한 일을 하시고서 그 몇 배의 시간 동안 망가진 오른손을 주무르며 사신다.


작년에 이직과 함께 독립한 이후로 일은 편해졌고 투자는 잘 되는 덕분에 마음도 넉넉해졌다. 엄마가 아픈데도 정작 내가 정신을 못 차렸던  미안하기도 하고 이제는 이래저래 잘 풀리는 것 같아서 한동안 엄마를 만날 때마다 용돈을 열심히 드렸다. 요새는 2주에 한 번씩은 외식을 하고, 마트에서 장을 봐도 내가 계산을 한다. 스타벅스 어플에 돈도 충전해둔다. 이상하게 내가 집에 갈 때쯤 늘 쌀이 떨어져서 한 포대씩 사게 된다. 엄마는 항상 왜 또 그러냐면서도 환장하게 좋아하신다. 나는 이걸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이 생활을 지키고 싶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자취를 한 지 1년이 넘었지만 가끔 재택일 때엔 부모님 집에서 일을 하곤 한다.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갈 때 엄마는 무슨 입대하는 것처럼 현관 밖까지 배웅을 해준다. 나는 그때마다 블라블라가 생각난다. 2층 고깃집 계단을 내려와서 헤어질 때 그 엄마의 뒷모습이. 엄마도 어쩌면 요즘의 내 뒷모습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닐까.


2021. 8. 18.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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