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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여름밤 아카시아 Apr 27. 2022

 침묵이 짓는 시

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은 없다.  침묵이라고 일컫는 의식을 깨고 온갖 자연의 소리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침묵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내 머릿속의 모든 소리들이 침묵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쉬고 싶다는 것은 나에게 그런 것이었다. 무수한 의미로 가득 찬 침묵이라는 폭신폭신한 베개를 베는 것. 삶의 방향이 자신의 중심을 찾을 때마다, 늘 고양이 털처럼 보드라운 그 침묵의 결을 계속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침묵을 베고 있으면 세상이 나에게 걸어오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단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언어를 할 줄 알게 되는 것처럼 내가 모르고 있던 세상의 언어를 읽기 시작하고 그 의미를 알게 되면  세상은  무수히 연결된 작은  의지들 같아 보였다. 일상 속에서 침묵을 지켜내고자 하는 나의 의지도 그런 것이었다.



수목원에 일하면서 종종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점심을 먹고 수목원을 한 바퀴 돌았다. 매 계절마다 피는 꽃들은 다르고, 숲이 푸릇푸릇해지는 시기가 다르고, 숲을 움직이는 바람과 날씨가 달라서, 어느덧 빨리 사라지려는 꽃들과 보이지 않는 계절이 하고 있는 일들을 쫒아가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나만의 시간을 내어 수목원 주위를 걷곤 했다. 벚꽃이 피는 듯하면 곧 졌고 튤립이 화려해진다 싶으면 곧 시드는 일상 속에서 의미의 순간들을 기록해가는 내 몸속의 문장들이 아쉬워하지 않도록 종종 침묵으로써 다독였다.


 

자연을 경험한다는 것은 침묵을 이해하는 일과 같았으므로, 혼자 하는 산책 속에서 일어나는 사색들과 영감을 따라 나의 의지와 욕망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지켜보는 일은 모두 침묵 속에서였다. 

내가 즐겨 읽던 책은 침묵이었고 곳곳에 밑줄 그어진 침묵 속에는 내 안에 살고 있는 세상의 인기척들이 눈부시게 비쳤다 사라지고 지상의 표면을 향해 솟아올랐다 경계를 허물었다. 



문득 비 오는 날 수목원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고 들려오던 개구리 소리는 온종일 자신의  침묵을 디디고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자연의 빛깔 같았다. 우연히 바라본 나무옹이 속에 살고 있는 개구리 한 마리에 반가워하는 마음을 어쩔 줄 몰라하는 것. 평일의 마음은 그런 마음을 모으는 일을 뜻하였다.   

늦은 저녁, 비어있던 개집 안에 길 고양이 한 마리가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온 날은 마치 침묵이 이끌어온 내 안의 쉬고 싶어 하는 문장들 같았다.



혼자 있는 순간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내가 어느 순간부터 침묵을 귀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날부터였다. 

일상의 실용적인 시선에 의해 가려졌던 침묵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나였다. 밤새 장맛비가 내리고 다음날 아침에 솟아난 옥수수 새싹을 눈으로 만지는 사사로운 일을 거룩하게 해 나가는 사람이 세상에 없는 침묵이라는 직업 같았다.

 


귀를 열고 눈을 열고 마음을 열게 하는 일이 뿌리를 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늘 궁금해하는 사람이 던지는 침묵들이 세상에 설레는 일들처럼  드러날 것 같았다.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쓰이지 않고 있던 침묵을  보이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들을 위해  

마음이라는 문장으로  채워 넣는 한 사람이  세상 속에 긴 여백처럼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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