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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Aug 22. 2022

멜번 일일 가이드, 메를린 할머니

한 발짝만 '다가서면' 바뀌는 전부

다가서다: 어떤 대상이 있는 쪽으로 더 가까이 옮기어 서다.


다시 또 혼자서, 멜번의 첫인상은 낯섦 그 자체

뜨거운 안녕을 고하기 바빴던 인도에서의 3개월이 지나고, 본격적인 어학연수를 위해 호주 멜번으로 떠났다. 영어 공부만 하면 되었던 인도와는 다르게 호주에서는 모든 걸 다 내가 스스로 해야 했다. 집을 구하는 것도, 먹을 음식을 만들고, 집을 청소하고, 랭귀지 스쿨 포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도 호주는 모든 낯섦 투성이었다. 멜번 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해 공항 밖을 나서자 후덥 한 열기의 인도와는 다르게 내가 상상했던 따뜻한 호주와는 다른 첫인상과 함께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으며 다시 혼자됨을 실감했다. 다시, 또 처음부터 시작이구나.


내가 상상했던 홈스테이와는 많이 달랐다

멜번에서 처음 적응하는 2개월간은 호주 현지인과 좀 더 친숙해지기 위해 랭귀지 스쿨에서 연계된 홈스테이를 신청했다. 1층은 카페, 2층은 하숙을 하던 홈스테이 집은 호주인 아저씨와 중국계 호주인(?) 엄연히 말하면 호주 시민권자인 중국인 아줌마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호주 현지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전 숙식 해결과 더불어 그들의 문화에 적응하는 디딤돌의 단계라고 생각하고 꽤 비싼 돈을 지불하고 갔던 홈스테이는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고, 뼛속부터 중국인인 중국인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그녀의 영어는 중국어의 억양을 그대로 유지한 영어를(우리나라로 따지면 콩글리쉬겠지) 구사했고, 호주인 아저씨는 홈스테이에 머무는 동안 얼굴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내가 도착했을 땐 멜번대를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 한 명, 나랑 같은 랭귀지 스쿨에 다니는 하지만 나보다 몇 개월 더 일찍 호주에 온 일본인 한 명이 있었다. 아무튼 이 중국인 홈스테이 맘은 옛날 사람이어서인지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선 무조건 찬양하는 비뚤어진 세계관을 가진 아줌마였다. 여기서부터 나의 고난이 시작되었지. 


9월의 멜번은 생각보다 훨씬 추웠다

호주는 남반구라 우리나라와 반대의 계절을 가지는데, 한창 가을의 시작인 한국과 반대로 호주는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도는 크게 우기와 건기로만 나뉘었고, 호주도 멜번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연중 내내 따뜻한 기후를 자랑하는데 멜번이 괜히 호주 안의 영국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얼마나 자주 소나기가 내리는지 멜번 시민들은 익숙하다는 듯 웬만한 소나기 예보엔 우산을 안 들고 다녔고, 유독 내가 간 9월이 우기였는지 흐린 날이 많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봄 날씨를 생각하고 얇은 옷들만 챙겨 갔다가 2층 맨 끝 차가운 냉골 방에서 수도세와 전기세에 민감한 홈스테이 맘의 눈치로 몸도 춥고 마음도 추운 외로움에 아는 이 하나 없는 막막함에 사묻혀 잠들곤 했다.


그렇게 다가 온 멜번에서의 첫 번째 주말

중국인 유학생은 호주에서 일하는 스위스 파티시에 남자 친구와 어딘 가를 간다고 했던 것 같았고, 일본인 친구는 무슨 서커스를 보러 간다고 나갔던 것 같다.


집에 있으면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귀찮음 때문인지 나가서 좀 돌아다니라는 홈스테이 맘의 지속적인 그리고 은은한 갈굼에 "점심은 샌드위치로 먹게 싸주세요."라고 요청했다가 "원래 주말에 나가면 사 먹는 거야" 이러면서 돌같이 딱딱한 빵에 치즈 한 장 살라미 한 장 넣어주며 생색내는 홈스테이 맘... 온갖 갈굼에도 굴하지 않고 'YES, THANK U' 하며 일단 시내로 향했다. 

멜번을 가로지르는 야라강, 야라강 주변은 잘 정돈된 잔디밭으로 늘 시민들로 붐빈다

시내 안에도 큰 녹지 공간이 많은 호주, 공원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며 샌드위치 먹으며 여유로움 즐기는 일, 정말 해보고 싶었다지? 시내에 도착해서 읽을 책 하나 살까 돌아다니다 창고 정리하는 상점에서 집어 든 미스터리극. 책 한 권과 빵을 들고 공원으로 가서 빵 한입 먹고 책 좀 읽으려고 했는데, 빵이 너무 맛이 없어서 PASS.


그때 문득 드는 생각, 공원에 친절해 보이는 호주인에게 말을 걸어볼까?

내 영어가 이들에게 통하는지 궁금했다. 기웃거리다 혼자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작은 용기는 하루를 통째로 바꾸는 시작이었다.



세인트 킬다에서 오신 메를린 할머니

이름은 Marlyn, ST.KILDA에 사시는 할머니는 우아한 하지만 과하지 않은 주얼리를 걸친 고운 할머니셨다. 어색하게 "오늘이 내 멜번에서의 첫 번째 주말이에요"라고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메를린 할머니의 따님은 지금 아일랜드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멜번이 낯설어 보이는 나를 보고 문득 본인의 따님을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메를린 멜번 데이 투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멜번을 둘러보았냐고 해서 아직이라고 답했는데, 갑자기 본인이 멜번 일일 가이드를 해 주겠다며 메를린 할머니는 나를 끌었다. 


그렇게 시작된 멜번 데이 투어. 멜번 관광객들이 멜번에 처음 오면 제일 많이 타는 35번 트램을 타고 멜번 도서관, 퀸즈 마켓 등 멜번의 주요 명소들을 한 바퀴 돌았다. 각 명소마다 어떤 장소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고, 외롭다는 나를 데리고 본인 동네의 ST.KILDA로 향했다. 그렇게 멜번 남쪽인 세인트 킬다까지 걷고, 소개하고, 또 중간중간 사진도 찍어주시고(심지어 나중에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 주셨다, 우리 엄마보다 더 신세대 셔 ㅎㅎ) 그리고 동네 자주 가는 단골 펍에서 시원한 아이스티를 사주시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처음으로 호주에 온 게 좋고, 좀 안심되던 날... 


세인트킬다에서 메를린 할머니와 함께, 당시 내가 주로 밀던 포즈 - 하이파이브

아마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일 것 같다

내가 먼저 다가서면 그 사람에게 지고 들어가는 것 같고, 왠지 날 우습게 어쩌면 호구로 볼 것 같은 생각에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꽁꽁 여며 닫는다. 심지어, 순도 호의로 내 마음의 문을 두들기는 사람이 와도 그 사람의 진정성을 시험해 보며 그렇게 어렵게 문을 열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다가서는 사람은 늘 더 용기 있는 사람이다. 

먼저 상대에게 다가설 수 있을 만큼 늘 더 품이 넓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다가선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든 마음으로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반발짝이라도 먼저 다가서면 다가선 나도, 가까워진 그도 이미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쌀쌀한 날씨만큼 쓸쓸했던 나를 따뜻한 품으로 안아 준 메를린 할머니. 그녀의 호의는 정말 순도 200%의 진심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신의 딸도 누군가에게 이런 진심 어린 호의를 받기를 기대하며 내게 베푼 선의였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에 관계에 이리저리 치이며 한 동안 잊고 있던 '다가서다'라는 단어를 내 사전에 다시 한번 새긴다.


다른 날, 호주에서 잘 적응하며 해맑은 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다가와 주었던 메를린 할머니의 호의는 외로운 유학생에게 앞으로 당차게 적응해 나갈 용기를 불어넣었고, 이렇게 오랜 시간 후에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해 멜번을 따뜻한 도시로 기억나게 하는 마법을 부렸다.


언제나 시작은 어렵다. 하지만, 뭐든지 시작하면 해 보지 않을 때는 상상할 수 도 없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날, 메를린 할머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메를린 할머니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멜번은 나에게 다르게 기억되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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