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이 슬프지만은 않아
시절 인연: 현대에는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뜻으로 통하며 때가 되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인연의 시작과 끝도 모두 자연의 섭리대로 그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었다
20대 초반 인도와 호주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나는 늘 다른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역할이었다. 3개월의 인도 생활에서 친해진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먼저 인도를 입국해 출국 날짜도 당연히 더 빨랐는데, 나와는 다르게 심지어 대부분 인도에서의 연수는 2개월로 잡고 제2의 국가로 넘어가는 일정이라 그마저도 나와 겹쳐지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내가 어학연수를 갔을 2007년 당시엔 필리핀처럼 물가가 저렴한, 하지만 공용어를 영어를 쓰는 국가에서 워밍업으로 3-6개월을 보내고, 본격 서구권 국가로 넘어가는 연수 패턴이 유행이었다. 나 역시도 유학원의 추천으로 인도-호주를 선택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식하니 용감하다고 22살, 만 20살의 어린 나이에 혼자 가족을 떠나 처음 지내게 된 도시가 무려 인도의 구르가온이었다.
사실, 인도로 연수를 가기 전엔 집안 사정상 어렵게 온 연수였던 터라 여행은 사치라는 생각에 연수를 보내 준 엄마에게 보답하는 길은 영어를 완벽히 마스터하고 가는 것뿐이라는 독한 마음을 먹고 경주마처럼 달렸는데 인도에서 만난 너무 좋은 인연들, 그리고 생각보다도 너무 너무 너무 저렴한 인도 물가에(4곳의 여행을 했는데 5백 불로 끝남 ㅎㅎ) 나 혼자였으면 꿈도 못 꿀 인도 여행으로 내 인생의 두고두고 꺼내볼 소중한 순간을 얻었다.
함께 친하게 지냈던 6명의 언니 오빠들과 누군가 인도를 떠날 때마다 우리는 벤 택시에 함께 올라 공항까지 배웅했는데, 나는 매번 그렇게 폭풍 오열을 했더랬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마도 지금 이렇게 가족처럼 매일 얼굴을 보며 쌓은 끈끈하고 애틋한 서로의 관계가 제2의 국가에서 각자의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어지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냥 슬프고 아쉽기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나 둘 떠나고 마지막 한 명의 언니를 배웅할 땐 공항에서 둘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울타리를 떠나, 나 홀로 멜번
그렇게 인도에서 3개월 간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는 제2의 도시 호주 멜번에 다다랐다. 인도에서의 3개월은 어찌 보면 말문을 트기 위한 가성비 높은 일타강사 1:1 과외 같은 느낌이었다면 호주 멜번은 어학원을 다니지만 원어민과 함께 생활하며 영어 마스터를 위한 실전 같은 비장한 시간이었다.
큰 울타리 안에서 식, 주가 모두 알아서 해결돼 오로지 영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인도의 기숙사 어학원과는 다르게 호주에서는 처음 2개월만 홈스테이를 신청해 두었고, 그 이후부터는 내가 살 집을 직접 구하고 의, 식, 주를 모두 내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계획된 셋의 합동 생일 파티
치열하고 어찌 보면 외로운 멜번 생활 중 틈틈이 인도 팸과 이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당시 페이폰은 문자나 전화도 다 건당 요금이 있던 터라 가난한 유학생에겐 사치였고,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은 나에겐 이메일도 어학원의 공용 컴퓨터로 간간히 확인할 수 있는 정도라 가끔 메일함에 꽂힌 반가운 소식 한 통은 어쩔 땐 1주일을 힘을 내게 하는 외로운 타지 생활의 따뜻한 온기 그 자체였다.
인도에서 만난 인연들은 지금도 내 인생의 귀인들이 분명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중 수(Sue) 언니와 피터(Peter) 오빠(모두 서로의 영어 이름으로 부르던 시절 ㅎㅎ)는 정말 늘 날 동생처럼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외로운 타지 생활에 따뜻한 안부를 이어가며 힘이 되었던 존재들이다. 나보다 6살 많은 수 언니의 막내 동생이 나랑 동갑이라 언니는 날 더 이뻐했다. 그리고 늘 조용히 해야 할 말만 하고, 다른 사람을 행동으로 배려하는 강단 있고 뚝심 있는 피터 오빠, 그런 우리가 운명처럼 모두 11월 생일자였다.
11월 초에 생일인 나를 시작으로 1주일 간격으로 줄줄이 생일이라 뉴질랜드에 있던 피터 오빠와 호주이지만 동쪽 끝 브리즈번에 있던 수 언니와의 생일 기념 합동 여행에 의견이 모아졌다. 정확히 누가 먼저 생일 겸 합동 회동을 제안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시드니에서 함께 보낸 합동 생일파티는 내 생각보다 더 긴 잔상을 남긴다.
생일마다 떠오르는 도시, 비 내리는 시드니
난 시드니행 교통수단으로 멜번에서 밤새 자면서 가는 버스를 선택했는데, 버스는 누워갈 수 있는 편안한 버스였지만 모처럼 두 사람을 만날 마음에 설레어 가는 내내 잠을 설쳤다. 그렇게 선잠을 자고 마주한 시드니의 아침, 나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이미 시드니에 도착해 있었다.
화창한 오페라하우스를 떠올리며 여행을 계획한 우리를 비웃듯 혹은 인도에서의 추억을 되살려주려는 하늘의 뜻인지 시드니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편한 둘. 마침내 생일이 겹친 주여서 다 같이 생일파티를 했는데 피터 오빠가 함께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부엌에서 서프라이즈로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생일날 아침, 엄마와 짧게 통화하며(국제 전화는 더 비쌌기에 용건만 간단히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통화했다, 살아있는 안부를 전하는 수준) 목소리를 듣자마자 둘 다 울컥 눈물이 터지고(연수 생활 중 전화하며 눈물을 보인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그래도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나 타지에서 생일날 미역국도 먹고 있다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6살 어린 여동생이 있는 나는 늘 K-장녀의 멍에를 지고 살았는데, 똑 부러지는 성격 탓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챙김을 받기보단 늘 이끌고 챙기는 역할을 해왔던 터. 인도에서는 어딜 가도 내가 막내였고, 안 해본 막내 역할이 어색했지만 늘 나를 따뜻하게 챙겨주는 언니, 오빠들이 고마웠다. 난 참 어리고, 편협하고, 서툴렀는데 평소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내 성격에 친하게 지내는 언니, 오빠는 당연히 없었고, 친척과도 큰 왕래가 없던 나는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같아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비 개인 오페라하우스만큼이나 반짝이는 추억
시드니는 내가 생각했던 화려한 도시보다는 뭐든 많았던 도시로 기억한다. 사람도 멜번보다 훨씬 많고, 골목이 많아 복잡하고, 그래서 쓰레기도 비둘기도 많고 여러모로 좋은 인상의 도시는 아니었는데 저 둘과 함께 해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시드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비가 정말 장마처럼 쏟아지던 날의 오페라 하우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는 봐야 하지 않겠냐며 길을 나선 우리, 흐린 하늘 아래 오페라 하우스는 어딘가 꼬질꼬질해 보였고(사진 속에서만 보던 오페라하우스는 쨍한 하늘 빨이었던가) 가장 저렴한 뒷 좌석을 예매해 이름 모를 오페라가 막을 올렸다.
하루 종일 빗속에 고생을 해서인지, 오페라하우스 안의 그 안락한 공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모든 걸 알아듣기엔 부족한 내 영어 리스닝 실력 때문인지 나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헤드뱅잉을 하며 졸아서 사실 오페라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 막이 내리고, 밖으로 나와 바라본 오페라하우스는 비가 고인 웅덩이와 오페라 하우스 주변의 조명이 어우러져 물기 어린 오렌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비오기 전엔 하얀색이 아니라 때가 탄 아이보리 색처럼 보였는데 비가 오고 밤이 되니 이뻐 보였다. 셋의 합동 생일을 기념하며 오페라 하우스가 보이는 테라스 바에 자리를 잡고 가난한 유학생 셋은 로제 와인 하나를 시켜 나눠 먹었다.
어디인지보다 누구와 함께인지가 중요한 여행
다음 날은 날이 개어 시드니 곳곳을 돌아다녔다. 호주엔 도시 안에도 워낙 녹지가 많은데, 시드니에 엄청 큰 공원이 있어 갔더니 글쎄 나무에 박쥐들이 매달려 있었다. 지금 떠올려도 충격적. 그리고 시드니의 또 다른 명소인 본다이 비치도 갔었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해변을 똑바로 걸어가는 게 힘든 정도였고,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 간 해변가 레스토랑의 오징어 튀김은 너무 짰던 기억.
또다시 눈물바다
그렇게 짧지만 알찼던 1박 2일이 빠르게 흐르고, 멜번으로 다시 돌아갈 땐 저가항공 국내선을 예약해 공항으로 향했다. 각자가 있는 도시로 그렇게 또 남은 연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헤어지던 탑승장, 주책맞은 안구는 또 눈물바다. 마냥 철부지 어린아이 같았던 당시 22살의 나는 마냥 헤어짐이 슬퍼 맨날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눈물바다였다. 한국에 돌아가면 각자 너무 멀리 살아서 보기 힘들 것 같고, 그럼 멀어질 것 같고. 그때는 그렇게 억지로라도 인연을 이어가서 내 옆에 두면 된다고 생각했던 철없던 나이였다.
시절 인연이어도 감사해
그래서 예전엔 인연의 시작과 끝이 모두 섭리대로 그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뜻의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를 참 싫어했다. 좋은 인연이라면 평생을 같이 가면 더 좋지 않나, 그렇게 시절 인연으로 사라질 인연이면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 그만큼인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하지만, 지금은 시절 인연으로라도 그때 그 순간, 내 인생에 나타나 줘서 그 자리에서 내 인생의 일부를 함께 채워줘서 너무 감사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너무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당시엔 어려서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 감사한 인연들이었다. 지금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결혼해 가정이 있어 예전만큼 자주 서로의 안부를 묻지 못하지만 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응원한다. 다들 보고 싶다.
글을 쓰다 보니 더욱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 두 분 모두, 내 인생에 많고 많은 생일의 한 자락인 22번째 생일을 두고두고 꺼내 볼 예쁜 추억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
운이 좋아 시절 인연의 운이 또 한 번 따른다면, 또 한 번의 합동 생일 파티를 할 수 있기를. 그때는 내가 대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