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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l 31. 2023

시작과 끝에 관한 사색 2

무와 무한 사이 1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집에서 80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이렇게 물리적인 세상의 제한된 여정 속에서 사람들, 집, 나무, 호수와 강, 새소리, 구름 등 우리 주변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일들은 모두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해 뇌로 흘러 들어가 기억으로 저장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의 유명한 그림 ‘기억의 지속’을 떠올려 봅시다. 고무 같은 시계가 햇빛에 녹는 피자처럼 나뭇가지와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날개 달린 말과 금이 흐르는 강, 나무로 만든 꼭두각시 인형들이 살아 움직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에는 우리가 소소하게 보고 경험한 일들을 결합하여,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았던 기상천외한 환영들을 창조해 내는 힘이 숨어 있습니다.


예술 작품 속 상상력은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과학 속의 상상력은 낯섭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숨 막힐 정도로 대담하고 빈번하게 상상하고 또 그것을 검증하는 분야가 바로 과학입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ames Clerk Maxwell은 자신의 방정식이 남긴 논리적 흔적을 따라, X선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와 같은 전자기 에너지의 파장이 우주를 통과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서로 다른 속도로 똑딱이며 움직이는 시계들을 떠올렸지요. 물론 그런 터무니없는 현상을 실제로 관찰한 적은 없습니다. (11-13 쪽)

위의 그림은 달리의 상상에 의해 형상화된 추상적 기억의 세계에 대한 창작이며, 아래의 그림은 맥스웰의 방적식에 따른 전자기장의 흐름을 도형으로 묘사한 것이다. 예술적 상상이 반드시 허구적인 창작이라고 보기에는 인간 기억의 보편적 잔상과 연관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맥스웰과 아인슈타인이 실험과 관측을 통해 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존의 역학적 원리를 넘어선 어떤 근본적 질서를 사고실험을 통하여 발견 하고, 나중에 실험물리학자들이 이를 증명하였다. 여기서 사고실험은 일종의 과학적 상상력인데 이 역시 무전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자의 암묵적 지식을 전제한다.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는 지식의 한 종류로서, 언어 등의 형식을 갖추어 표현될 수 없는, 경험과 학습에 의해 몸에 쌓인 지식이다. 학습과 체험을 통해 개인에게 습득돼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의 지식을 뜻하며, 내재적 지식으로 개인 및 조직의 행태에 대한 관찰 등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지식을 말한다.


이 말의 핵심은 상상의 원천이 무가 아니라 암묵적 영역이라는 뜻이다. 달리도 맥스웰도 예술적 체험 내지 과학적 지식이라는 시대적 토대 위에서 창의성을 발휘한다. 오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신만의 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보이지 않는 원자, 즉 너무 작아서 볼 수도 없고, 파괴도 할 수 없으며, 나눌 수도 없는 물질과 그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는 획기적인 상상력으로 과학적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00년 후,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상상했지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발명가이자 수필가, 신학자이기도 한 파스칼은 무한히 작고 무한히 큰 사물의 존재를 추측했습니다. ‘팡세 Pensées’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는 자연의 거대한 품에서 지각할 수조차 없는 한 점일 뿐이다. (…)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의 끝까지 아무리 그 개념을 확대해도 소용이 없다. 사물의 실체에 비하면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원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디에나 중심이 있고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무한한 구체다. (…)  무한 안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주에서는 감지할 수도 없었던 우리 육체가(…) 이제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무에 비하면 거대한 존재, 세계 아니 어쩌면 전체가 된 이 상황에서 그 누가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무한과 무, 이 두 심연 사이에서 자연이 그에게 부여한 육체의 크기를 느끼며 그 경이로움에 전율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진 무도, 삼켜지는 무한도 모두 볼 수 없다.“(13-14 쪽)

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사유(pensees)의 대상이며, 무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실 개념이지만 내용(직관)이 없는 개념이기에 공허한 사유이다. 그렇다면 무와 무한의 두 심연 사이의 인간은 사유할 수 없는 사유,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자이다.


여기서 삶의 문제를 신앙으로 이해하려는 그의 내기가 무신론자들에게 제시된다.


'크리스천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손해 볼 것은 무엇인가? 설사 그가 죽어서 하나님도 없고, 그의 믿음이 헛된 것이었다고 판명되더라도 그는 잃을 것이 없다. 사실상, 그는 믿지 않는 친구들보다 더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도 계시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그는 천국을 얻을 것이고, 그의 무신론자 친구들은 지옥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은 학자로서 할 말은 아니다. 삶은 도박이 아니며, 확률의 문제도 아니다. 삶은 엄숙하며 삶에 관한 태도는 엄중하다. 그래서 저자는 파스칼의 사상을 좀 더 깊이 조망한다. 제로와 무한대 사이에 존재하는 찰나의 경점 같은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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