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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입원생활
12화
자꾸만 정체성을 들킨다
기분 좋은 실패
by
펭귀니
Mar 8. 2024
입원 25일 차.
이제는 병원이 내 집 같이 아늑하다.
특히 병원 휴게실은 어느 순간부터 아지트가 되어 무료한 입원생활의 한 줄기 빛이 되어주고 있다.
따뜻한 온돌방의 기운 탓인가?
환자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과도하게 몰입할 때가 있다.
특히 한평생 희생하며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곤두설 정도로 집중해서 듣게 된다.
"그게 무슨 신세예요?"
라는 내 말에 본인 딸과 같은 말을 한다며 눈이 동그래진 어르신.
"첫째는 골반 안 아픈 게 이상하고
둘째는 공황장애 안 오는 게 이상하고
셋째는 집안이 시끄러운 게 이상하죠."
그저 내 생각을 말씀드렸을 뿐인데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 기분이 좋아져서 나만 알고 있으려던 병원 생활 꿀팁까지 전수해 드렸다.
"오늘 진짜 잘 만났구먼. 고마워요."
칭찬에 기분 좋은 건 오히려 나였기에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려는 찰나 훅 들어온 정체성 어택.
"완전히 카운슬러네 카운슬러."
그냥 산후풍 심한 아줌마 컨셉으로 밀고 나가려다가 또 들키고야 말았다.
"카운슬러 맞아요."
병원 휴게실에서 찾은 내 적성. 노인상담사.
이제는 내가 휴게실 밖으로 나가려 하면 함께 누워있던 어르신들이 어디 가냐며 더 놀다 가라며 만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우리 병동에서 내가 카운슬러인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체성 숨기기에 실패했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실패는 나를 일으킨다.
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얻은 병.
원치 않았던 길어지는 입원생활.
다시 일할 수 있을지 걱정되고 답답했던 시간들.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 공간에서 내 적성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다.
뭐든 마음먹기 나름이다.
치열했던 노동자 시절의 흔적. 장소만 바뀌었을뿐 내가 카운슬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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