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위기가 오고 서로에게 책임을 물으며 싸우다가, 어느 날 남편이 추락사한다. 집에 같이 있었던 아내가 용의자로 몰린다. 재판을 하며 그들의 결혼생활은 낱낱이 해체되어 까발려진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일 여성 작가인 포이터와 프랑스 남성 교수 사뮈엘은 서로의 지적인 면에 이끌려 사랑하고 결혼한다. 남편 사뮈엘은 나중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포이터는 가사를 처리하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하는 글을 꾸준하게 쓰고 있다.
아들 다니엘을 낳고 행복하게 살며 육아를 분담했는데 사뮈엘이 글을쓰다가 아들을 데려오는 것을 깜박 잊고 늦는 바람에 다니엘이 혼자 오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시신경을 다쳐 눈이 안 보이게 된다.
이날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아빠인 사뮈엘은 자신 때문에 아들이 그렇게 되었다며 죄책감에 시달리고 아들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를 돌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병원비도 많이 들고 직장에도 전념하지 못하게 되어 경제적인 문제도 생기게 된다.
결국 그들은 살고 있던 런던을 떠나 가족 모두가 사뮈엘의 고향인 프랑스 산간의 주택으로 이사 오고 거기서 아들을 홈스쿨링하고, 집을 보수해서 놀러 온 사람들에게 대여해서 돈을 벌기로 결정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주변을 소재로 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아내에 비해, 조용하게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글을 쓸 수 없는 남편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어느 날 대학원생이 포이터를 인터뷰하러 왔을 때 아내가 큰소리로 대화하며 즐거워하자, 지붕을 수리하던 사뮈엘이 집이 떠나갈 듯한 큰 볼륨으로 음악을 틀어 대화를 방해한다. 인터뷰는 중단되고 거북해진 아들 다니엘은 안내견 스눕과 산책을 떠나고 포이터는 위층으로 올라간다.
1시간쯤 뒤 다니엘이 돌아왔을 때 개가 짖어대고 아들은아빠가 눈밭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알고 울며 엄마를 부른다. 그렇게 사뮈엘은 죽고 그때부터 죽은 원인에 대해 조사가 시작된다.
상처로 보았을 때 머리는 떨어질 때 헛간 지붕에 부딪쳤거나 둔기로 맞았을 두 가능성이 다 존재했다. 즉, 자살과 타살의 가능성이 다 있었던 것이다.
포이터는 자신이 용의자가 되자 친구 뱅상을 변호사로 선임하는데 그는 그녀의 혐의가 풀리려면 남편이 자살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고 한다. 그녀는 반년 전 남편이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고 하지만 재판에서 남편의 정신과 의사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의 우울증이 심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내가 그의 기를 꺾어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아들의 사고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포이터는 아들의 사고로 남편을 원망하기는 했지만 자신은 아들을 장애인으로 보지 않고 한 번뿐인 삶을 그가 주도적으로 행복하게 살게 하고 싶었다고 하며 자신은 단지 남편이 자기 고통을 아들에게 투사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어른들은 어린 다니엘이 부모의 사생활이 드러나는 재판에 참석하는 것을 걱정하지만, 다니엘은 모든 과정을 다 듣고 자신이 극복하겠다며 재판정에 참석한다.
그녀는 아들에게 부모의 치부를 듣는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며 그래도 자신은 아빠를 죽인 괴물이 아니라고 하며 아빠는 엄마의 영혼의 반쪽이었다고 말한다.
남편이 글을 쓰기 위해 일상을 녹음하고 자신의 생각을 녹음한 USB가 재판에서 공개된다. 죽기 전날 부부가 싸움을 하던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편이 자신도 글 쓸 시간이 필요한데 아내가 아들 교육과 집수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자, 그가 홈스쿨링을 하는 것은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것이고 런던에서 타향인 프랑스로 이사한 것은 그의 제안이므로 집수리는 그의 몫이고 글 못 쓰는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말라고 쏘아붙인다. 그녀의 외도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고 그가 사고 후 부부관계를 거부했다는 것도 밝혀진다. 그의 예전 글에서 어떤 부분을 그녀가 자신의 책에 각색해서 썼고 그때는 그도 동의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표절이라고 비난한다. 마지막에 그는 아내의 ‘냉정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하고 둘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소리도 담긴다.
변호사는 남편이 아들의 사고 후 죄책감에 시달린 반면 아내는 계속 승승장구했고, 그가 자신의 글을 출판사에 보냈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자 수치심과 절망감에 싸여 마지막을 준비했을 것이라고 변론한다.
마지막으로 아들인 다니엘의 증언이 있었다. 그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를며칠간 보지않는다.
그간의 재판에서 들어왔던 여러 진술과 자신의 경험을 연결시킨다. 반년 전에 있었던 아빠의 자살 시도를 몰랐으나 그때 안내견 스눕이 바닥의 무언가를 먹고 며칠간 비실대며 물만 먹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다시 서랍 속 약을 꺼내 개에게 먹이고 실험하니 그때와 똑같은 증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낸다.
또 다른 하나는 아빠가 그때 자신과 함께 개를 병원에 데리고 가면서 “소중한 존재도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도 늘 남을 챙겨야 하니 피곤할 때도 됐어.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떠나야지.”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서 재판에서 진술한다. 그때는 그것이 개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빠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결국 1년 이상을 끈 재판에서 아빠의 사인은 자살로 인정되어 엄마는 무죄판결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과 포옹하고 내려온 그녀에게 스눕이 다가와서 위로한다.
겉으로 보면 누군가가 죽고,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내는 영화라고 생각되지만, 전지적 시점의 화자가 없어 전말을시원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범인을 밝히는 재판 과정을 통해 부부의 마음을 해부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성향이어서 끌렸던 부부는 가장 소중한 아들의 사고 이후에 첨예하게 대립한다.
둘이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정 반대이다. 남편은 자신이 사고에 대해 죄책감도 갖고 있지만 그보다도 사랑하는 존재와는 가까이서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아내는 아들이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게 하려면 일일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놔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홈스쿨보다는 학교에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아들을 위해서 병상을 지키고 홈스쿨링을 하고 먹을 것을 챙기느라 직장도 줄이고 마음도 복잡하고 그래서 글도 못쓴다. 아내는 자신이 걱정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할 일은 한다. 여전히 주변일을 소재로 글도 꾸준히 쓴다. 그녀는 그가 시간이 없어서 글을 쓸 수 없다고 징징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둘이 화합할 수 있는 접점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차가움에 질리고, 자신의 꿈은 멀어져 가고, 아들을 계속 보는 것도 슬퍼지는 시점에서 삶을 중단한다.
아내는 자신의 사생활의 단편들을 재판을 통해 객관적으로 본다. 그것이 해부돼서 만인에게 회자되고 가십으로 전락하는 것도 참을 수 없지만, 가까운 존재들마저 자신의 사랑과 결혼이 환멸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슬프다. 그녀는 부부의 세계는 일부분만 가지고 말할 수 없다고 항변한다. 아들에게 둘이 많이 싸웠지만 아빠는 엄마의 영혼의 짝이라고 말한다.
아들 다니엘에게 아빠는 특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언제나 옆에 있어주고 먹여주고 도와주는 존재였다. 아빠가 죽자 그는 슬퍼서 하염없이 운다. 아마도 재판을 보면서 혹시 엄마가 떠밀어서 아빠가 추락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예전의 자살 시도의 경우에도 그 약을 엄마가 아빠에게 먹였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엄마는 이성적일 뿐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판단은 직관적인 선택이다. 일단 선택을 하고 나면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금방 찾을 수 있다. 엄마가 아빠의 죽음에 물리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쪽을 선택하자, 아빠가 과거에 한"소중한 존재가 언젠가 죽을 것을 각오하라"는 말을 아빠도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는 엄마도 방법이 다를 뿐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체된 부분들을 다 합치면 전체가 될 수 있을까?
일단 모든 부분을 다 해체할 수는 없으니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몸체의 일부분만 해체하고 그것을 조립한 후 전체라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혼이 힘들어질 때 일어난 일을 해부하고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맞지 않다. 좋았던 부분도 다 꺼내서 판단해야 한다.
결혼의 증인인 아들을 시각 장애인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그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설령 눈이 보여도 상황을 다 파악할 수는 없다. 누구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부분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 있게 모든 진실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참으로 단순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