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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May 25. 2022

영화<블루 재스민>-껍데기만 있는 여자의 이야기

남에게 의존하는 인생

    

테네시 윌리암스의 원작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블랑쉬(비비안 리)는 자기를 정신 병원으로 데리고 가려는 친절한 의사를 자신을 숙녀로 대우해 주는 신사라고 착각하여 팔짱을 끼고 따라나서며 말한다. “나는 평생 타인의 친절에 의존해서 살아왔아요.”

한 번도 자신의 힘으로 살아본 적 없는 그녀는 결국 파국으로 가는 길도 남의 손에 의해서 끌려간다.

영화 <블루 재스민>은 우디 앨런이 테네시 윌리암스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만든 영화라고 한다. 블랑쉬와 재스민이 몰락해 가는 이야기를 비교해가면서 보면 재미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입양된 자넷은 대학을 마치기도 전에 이혼한 부잣집 남자 할을 만나 결혼한다. 이름도 분위기 있어 보이는 재스민으로 개명하고 뉴욕에서 결혼하여 최상류 층으로 살아가던 재스민은 파티와 명품 쇼핑 등 화려한 생활에 젖어 남편의 불법적인 사기행각과 외도를 알면서도 눈감아 왔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10대 어린 애인과 앞으로 같이 살겠다고 선언하며 자신과의 결혼을 끝내려 하자 그의 사기행각을 FBI에 신고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파멸시킨다. 남편은 결국 감옥에서 자살했고 아들 대니는 하버드를 자퇴하고 집을 나간다.


그녀는 파경 후 빈털터리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가난한 이복 자매 진저의 집에 신세 지러 온다. 파산해서 돈도 없는 형편인데도 그녀는 1등석 비행기를 타고 명품 옷과 명품백을 걸치고 명품 러기지를 끌고 비행기에서 알지도 못하는 옆좌석 할머니에게 자신이 과거에 누렸던 화려한 생활을 떠벌리고 택시 기사에게 팁을 100달러나 뿌리며 화려하게 동생의 집에 등장한다.

재스민이 남에게 신세 지는 주제에 동생의 초라하고 저급한 환경을 한심해하고 동생의 남자 친구를 루저라며 무시하지만, 소박하지만 자신이 일해서 돈을 벌고 아이들을 낳고 거칠지만 서로 사랑하는 애인과 사랑하며 살아가는 진저는 언니를 품어준다.


한 번도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 없던 재스민이 일도 해보고 미래의 계획도 세워보려 하지만 만만치가 않다. 자신의 유일한 재능인 미적 감각을 이용하여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만 학교에 들어갈 돈은 없고 온라인으로 자격증을 따기에는 평소에 실제적인 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컴퓨터를 다루는 실력도 형편없다. 결국 먼저 컴퓨터를 배우기로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치과병원 카운터에 취직한다. 그러나 의사가 그녀를 집적거리고 환자들은 그녀를 짜증 나게 하고, 동생과의 더블데이트에서는 세련되지 않은 노동자 계급의 남자가 나와 그녀를 실망시킨다.


결국 우연한 파티에서 마주친, 재스민의 의상과 백과 구두의 브랜드와 등급을 알아보는 고급 취향의 정치 지망생, 외교관 드와이트를 만나 자신을 또 한 번 거짓으로 포장하며 다시 한번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러나 드와이트와 결혼반지를 맞추러 가는 길에서 과거 재스민 부부가 사기를 쳐서 돈을 빼앗아 꿈을 짓밟고 이혼까지 이르게 했던 진저의 전남편 오기가 나타나 그녀의 정체를 폭로한다. 남편은 자살하고 의붓아들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드와이트는 결혼을 취소하고 떠난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희망은 없다.

그녀는 정신이 나가서 여전히 명품 샤넬 재킷을 입고 에르메스 백을 들고 초점 없는 눈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 옆에 앉아있는 모르는 사람에게 과거에 자신이 누렸던 부귀영화를 이야기한다.



재스민은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진저와 함께 입양된 아이였다. 버려진 존재여서 어릴 적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운이 좋게도 좋은 외모를 타고난 덕분에 양부모로부터 동생에 비해 특별대접을 받고 자랐다. 껍질과 가면이 중요하다는 레슨을 어릴 때부터 받은 셈이다. 촌스러운 이름도 스토리를 곁들여 재스민으로 바꾼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부자 남자의 관심을 끌고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직업도 가져보지 않고 이혼남과 결혼해서 상류층에 진입한다. 그러니 한 번도 내면의 가치나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본 적이 없다. 남편 할은 그녀에게 명품과 보석과 화려한 생활을 제공했고 그녀는 우아한 외모와 취향으로 그의 옆자리를 빛냈을 뿐 서로가 사랑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알맹이 재스민만 빼고 그녀의 껍데기만 명품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진정한 사랑이 이 여성을 구원할 수도 있었는데, 할은 아내가 자존심을 갖고 스스로 서게 하는 사랑 대신, 밖에서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며 그녀에게는 다이아몬드 팔찌를 선물하였다. 그런 남편의 요구에 부응하여 재스민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세련된 외모와 매너 가꾸기에 집착했다.

더 어리고 예쁜 여자가 나타나자 갈아탄 할이나, 그가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을 안 순간 그전에는 알고도 모르는 척했던 그의 비리를 경찰에 알려 그를 파멸시킨 것으로 보아서는 둘은 서로를 사랑하기는커녕 이용하는 관계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할의 아들도 재스민과 비슷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떳떳하지 못한 일로 돈을 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지만 모르는 척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았다. 명문대학에 들어간 후, 부자여서 기부금을 많이 내고 초청 강연을 하는 아버지를 자랑하면서 살다가 아버지가 추락하여 사기꾼임이 밝혀지자 자신도 학교를 그만두고 수직 하락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새엄마 재스민과도 겉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그녀로 인해 아버지가 몰락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원망하고 절연한다.

둘 다 스스로 노력하고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는 해보지도 않고 할이 제공하는 조건만을 이용하다가 몰락하는 인간들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역할은 심리학적으로 ‘페르소나’이다. 페르소나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당사자가 그 역할이나 행동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며 페르소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 때에만 순기능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아와 혼동하며 부박한 삶을 산다. 재스민이 그랬고 결국 그녀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그림자’는 억압되고 어두운 면을 나타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재스민의 자아는 허영의 극치인 페르소나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역설적으로 소박하고 독립적이고 건강한 캐릭터인 진저로 나타난다. 그녀는 예쁘지 않지만 일을 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이 최우선인 건강한 여성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경제적으로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언니 때문에 무산되었는데도 언니는 모르는 일이었다고 감싸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언니의 본색을 모른다는 것은 그림자가 자아에게 영향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재스민은 자신은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진저와는 다른 존재라고 소리치는데 그녀의 뜻과는 다른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즉, 진저는 인생과 사랑에 있어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재스민은 부자 남자에게 자신을 맞춰서 기생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다른 것이다.


페르소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의 중심가치에서 멀어지는 자아에게 경종을 울리는 부분은 진저의 전남편 오기로 상징되는 ‘아니무스’이다. 심리학적으로 페르소나의 가면을 벗기는 역할은 항상 아니무스가 한다. 영화에서는 오기가 드와이트와 결혼하려 하는 재스민의 거짓의 행적을 까발리는 역할을 한다. 재스민이 설정한 과거-외과 의사였던 전남편과 사별했고 자식도 없는-를 믿었던 드와이트는 그녀의 거짓말을 비난하며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떠난다. 그녀는 그것이 거짓말인 줄도 모른다. 그녀는 사실을 약간 꾸미고 몇 가지를 생략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무스인 오기는 페르소나 재스민의 허영과 위선을 참을 수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니무스의 경고를 무시한 재스민은 그것과 소통할 수 없다.  


그녀는 늘 혼잣말을 한다. 상대가 모르는 사람이거나 어린아이들이거나 상관없다. 내용은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가 성취한 일이 아니고 타인의 호의로 과거에 누렸던 화려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훌륭한 외모로 어떻게 부자 남자를 유혹했는가를 끝없이 되풀이해서 말한다. 그 순간에 나온 음악이 ‘블루문’이었고 영화의 제목에도 ‘블루’가 들어있다.  

취직을 권하는 진저의 지인들에게 자신은 대학으로 돌아가서 학위를 따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무슨 공부를 할 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대학 졸업자라는 껍질이 중요할 뿐이다. 그녀에게는 알맹이가 없다.

남이 베푸는 친절에 기대어 살면서 그들에게 잘 보이는 페르소나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결국 그들의 호의가 없어졌을 때 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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