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아기였을 때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서 안아주지도 업어주지도 못했고, 입덧도 심해 기운이 없어서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다. 자기도 아기였을 때 동생이 태어나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주지 못해서 늘 미안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큰아이가 너무 어려서 자기도 모르게 동생을 다치게 할까 봐 큰애만 따라다니며 조심시키느라 갓난아기는 방에 눕혀놓고 거의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가끔씩 아기가 엄마 얼굴을 보면 너무나 좋아하며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구하는 게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
또 엄마가 제대로 회복을 못한 채 동생을 가져서 아기가 작은 게 아닌가 자책도 했다.
어떻게 보면 엄마와 아이들이 모두 고생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연년생은 한꺼번에 키워서 편할 거라고 속 모르는 소리를 하면 씁쓸했다. 가끔 젊은 사람들이 물어보면 자녀 계획을 잘해서 이삼 년 터울을 두라고 진심으로 조언을 했다.
조금 더 자랐을 때도 작은 아이가 젖병으로 우유를 먹으니까 큰아이가 젖병을 떼지 못했다.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형에게 자기와 비슷한 동생은 젖병을 주고 자기에게는 컵으로 먹으라는 요구는 강한 저항에 부딪쳐서 결국 형제는 동시에 젖병을 떼게 된다. 결과적으로 평균보다 늦게 이유를 한 셈이다.
한 명씩 차근차근 키운 집을 보면 시행착오를 겪기는 해도 아이가 혼자 식사를 잘한다. 나의 경우는 어릴 때 아기 둘을 나란히 앉혀 놓고 밥을 먹여야 해서 식사 예절 교육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둘 다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니 정신없이 양쪽 입에 넣어 주기에 급급해서 스스로 밥을 먹는 것이 더디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핑계가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신경 써서 독립적으로 키우지 못했고 과보호했었다.
여기까지가 아이들의 첫 번째 이유기이다.
아들들은 이미 청소년기를 지나 벌써 성인이 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나에게 과보호하는 성향이 아직도 있어서 그들이 진짜 어른이 되는 걸 막고 있지는 않나 반성한다. 결혼 전에 독립적으로 혼자 생활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했어야 했는데, 학교 다닐 때 공부할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좋은 음식 만들어 먹이고, 스스로 해도 되는 일을 해결해주고, 차로 데려다 주기까지 하던 습관이 졸업 후까지 남아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스스로 돌보지 못하면 결혼해서 가족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워지겠는가 생각해보면 내가 큰 실수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아들들을 독립시킬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먼저 시킨 일은 아들에게 자신이 사용하는 화장실은 청소하게 한 것이다.
또 과일은 좋아하면서, 깎는 게 서투른 아들에게 사과와 과도를 내밀었다. 엄청 느리고 두껍게 껍질을 벗기지만 혼자 살아도 과일을 먹을 수 있어야 하므로 답답해도 지켜보았다.
간단한 아침 식사로 편한, 계란밥을 만들기 위해 노른자를 살린 계란 프라이도 하게 했다. 처음에는 껍질 깨는 게 서툴러서 조마조마했다.
쌀 씻고 밥 하는 것도 가르쳤다. 급할 때는 햇반을 먹더라도 기본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휴일에 볶음밥 같은 간단한 요리도 함께 해보았다. 번거로워서 안 해 먹을 것 같지만 나중에는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역국 끓이는 것도 가르쳤다. 나중에 아내가 아기를 낳았을 때나 생일에 해주면 좋아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간단한 요리도 가르쳐 보려고 한다. 혼자 살 때도 해서 먹고 나중에 아빠로서 자기 자녀들에게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들 옆에 붙어서 가르치면 잘 하지만, 혼자 하면 자주 하지 않으니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현실적으로 해 먹을 수 있는 초간단 레시피를 주려고 써서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들들에게 간단한 요리를 가르쳐서 집에서 내보내고 독립시키는 시기가 그들의 두 번째 이유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