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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균형감각

by 해이나

둘째의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이의 건강만 생각하기로.

일단 '공부'의 '공'자는 꺼내지도 않고, 약을 잘 먹이고 밥을 잘 먹이고 잘 쉬도록 도와주고 그렇게 하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불안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하교 후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둘째를 잘 살펴야 하는데 내가 손이 떨리고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닌가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한평생 공부든, 일이든 손을 놓고 쉬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살지 않는 삶-둘째의 쉼에 극강의 불안이 작동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몇 년 전 비상용으로 받아놓은 정신과 약을 꺼내 들어 먹었다. 먹어도 효과가 없자 다른 약들도 꺼내 들었다. 약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최소 한 달 이상은 먹어야 약효가 발휘된다고 적혀있었다. 오늘 하루 먹었다고 오늘 마음이 진정될 리가 없단 이야기였다. 그런데 오늘 둘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웃어주려면 안정이 필요했다. 그러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 약을 더 먹었다.


남편은 퇴근 후 이런 상태를 보고는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둘째나 당신이나 정신과 약은 최소 한 달 이상은 먹어야 약효가 발휘돼. 그러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계속 병원 다니면서 약 먹고 쉬면 둘째 마음도 좋아질 거야. 기다리면 반드시 좋아질 거니까 우리 믿고 기다려보자."


남편은 과거에도 내가 직장일로 힘들어할 때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검사를 잘 받고 진정하도록 도와주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단계를 밟아가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성적인 침착함이 언제나 큰 힘이 되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남편 말을 들으니 조금 힘이 생겼다.

그렇구나. 좋아지겠구나. 그래 좋아질 거야. 둘째가 건강만 하면 뭐든 괜찮지. 괜찮을 거야.





균형감각


우리 처음 만난 날

지하철을 탔어요


지하철이 출발하자

나는 손잡이 없이 가만히 있는데

당신은 손잡이를 잡고도 정신없이 흔들렸지요


균형 감각이 너무 없는 거 아니냐며

웃었습니다.


인생의 배를 함께 타고

20년이 흘렀네요.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나는 정신없이 멀미를 하는데

당신은 묵직하게 서 있네요


못 살겠다 울고 불고

욕하고 하소연하고 약도 먹는데

나를 꽉 잡고 흔들리지 않고 버티네요


이제 보니 균형감각 좋은 건

내가 아닌 당신입니다


당신의 균형감각이 날 살게 합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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