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 & 문경새재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조금 멀지만, 시간이 나면 종종 찾아 나서는 곳. 바로 청도 운문사이다. 지나는 길에 신불산, 가지산과 운문산의 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가 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빨갛고 노란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힐링되는 느낌이 든다.
첫째가 경험한 첫 운문사는 돌이 되기도 전이다. 매달 운문사 사리암에 가시는 시부모님은 첫째가 태어나자 사리암에 인사를 올리고 싶어 안달이 나신 듯했다. 사리암에는 생전 올라가 본 적 없던 10개월의 아기와 나. 오르막 초입부까지는 본인이 걸어 보겠답시고 아빠 손으로 조종하더니 이내 안긴 아기였다. 홀몸으로 오른 주제에 다음 날까지도 다리가 쑤시고 장딴지가 당겼던 엄마와, 아기를 안고 올라가 업고 내려왔지만 멀쩡했던 아빠. 참으로 이상하지.
부모님도 역시 운문사를 종종 가시곤 한다. 1년 휴직하는 동안 같은 아파트에 살던 부모님이 단풍 여행 가신다는데 (굳이) 첫째와 함께 끼여 간 적이 있다. 유모차를 가져왔는데도 굳이 손녀에게 목마를 태워주시는 외할아버지와 무척이나 가을스럽던 운문사의 풍경. 햇살이 한가득, 날씨가 쨍하니 맑고 좋았다. 아기는 흙을 만지느라 낙엽 위에 풀썩 앉아 버렸고 외할아버지는 아기에게 낙엽비를 내려주셨다. 도란도란 손녀와 조부모의 즐거운 한 때. 비구니들이 지나가며 흐뭇한 웃음 날려주시고, 아기는 엉덩이를 들썩들썩 기분 좋은 가을을 만끽했다.
빨갛고 노란 배경으로, 빨갛고 노란 옷의 외할머니와 손녀를 사진으로 남겨 본다. 노는 동안 한 땀 한 땀 직접 떴던 원피스는 마치 조끼처럼 올라갔는데, 옆에 앉아 놀던 아주머니가 옷 이쁘게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아기는 신발이 신기한 건지 흙을 밟는 느낌이 신기한 건지, 좋아하던 목마도 마다한 채 걸어보겠다고 아우성쳤다. 맑디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한적한 평일 오후, 사랑하는 딸과 운문사에 나들이 갈 수 있는 이 처지가, 좋은 추억을 선사해 준 부모님이, 노랗고 붉은 우리나라의 가을 단풍이, 이 모든 것들이 고맙고 고마웠던, 마음이 풍족해진 하루였다.
나는 운문사를 좋아한다. 특히 가을의 운문사는 가는 길 내내 알록달록 예쁘게 물든 가지산을 볼 수 있어서, 뭔가 마음이 따듯해지고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것 같다. 아직은 가을물이 덜 든 듯한 노랑 빨강 초록이 공존하던 운문사에 간 적이 있다. 따스한 햇살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운문사 가는 길에, 돌담이 예뻐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곧 있을 태풍 영향으로 강풍주의보가 발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들이 나온 사람은 어찌나 많던지. 계속 손잡고 걷던 시절 와 본 운문사를 아이가 제법 크고 나서 다시 찾았다. 새삼 많이 컸다 싶다. 아이와 함께 바스락, 바스락 떨어진 단풍을 밟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네 살 아이보다도 신나게 밟았다. 주렁주렁 감도 많이 열리고 정말 가을이구나, 했는데 그날은 바로 상강(서리가 내리는 시기)이었다. 아이는 정말 자연스럽게 아무렇게나 철퍼덕 앉아 놀았고 좋아하던 펭귄 인형을 더럽힌다. 빨갛고 노란 나무 근처 외엔 인파가 적었던 운문사. 고즈넉하니 한적하게 산책하노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문경새재이다. 가을에 꼭 가보려고 매번 벼르던 곳인데 거리가 멀어 가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에버랜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보기로 하였다. 11월의 가을 문경은 입구부터 엄청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은 얼마나 또 많던지. 노랗고 빨갛게 알록달록한 문경을 눈에 한껏 담았다. 사과와 오미자를 사들고 돌아가는 길이 가을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두 번째로 아이들과 찾았던 문경은, 시기를 잘 못 맞춰서 초록 초록했다. 무더위가 길었던 여름 후 찾아온 가을이었고, 갑자기 추워진 어느 날이었다. 에코 랄라에 들렀고 급경사의 모노레일을 탔다. 그리고 또다시 찾은 문경새재. 아직 물이 들기 전이었던 문경새재는 지난번 풍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당시 문경은 사과 축제 중이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사과체험은 개별 예약으로 각 농장에서 따로 진행된다. 신데렐라가 사랑한 문경사과즙을 팔던 한 농가에서 11kg 두 박스 따는데 5만 원이었는데 따다 보니 금방이다. 집에 가서 먹어보니 어찌나 달고 맛나던지. 높고 푸르른, 구름 한 점 없던 가을 하늘이었다. 날은 차가웠지만 볕은 강했다. 따스한 볕 아래 가족 모두가 사과를 따던 시간들이 좋았다. 완연한 가을을 보지는 못했지만 가을의 시작을 사과와 함께 맛본 문경이었다.
어느덧 처서가 지나고 가을이 다가온다. 올해 가을에는 어떤 단풍을 만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사과를 직접 따는 체험을 즐거워했던 아이들을 위해 사과나무를 분양받아 수확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아이들이 자연을 벗 삼아 사계절을 느끼고 뛰놀 수 있는 환경을 많이 경험할 수 있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