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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May 04. 2022

깃털

결혼에 대해 고민하는 그대에게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집 '대성당'을 김연수 작가의 번역본으로 처음 읽었던 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영어 원서 읽기 북클럽에서 '대성당'을 이달의 작품으로 선정했을 때 떠오르는 기억이라고는 그저 공작새 한 마리뿐이었다. 다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그 공작새가 몇 년 후 나를 찾아왔다. 공작새를 영어 원서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 세계로 빠져들게 될지도, 117년이나 된 미국의 이 작은 집에 살게 될지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상상하지 않은 일이 펼쳐지고, 그 중심에 공작새가 있다. 공작새를 따라 뭔가에 홀린 듯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게 됐다. 

‘대성당’ 북클럽이 시작되기 전부터 작품 해석에 몰두하던 어느 날이었다. 처음 맡은 북클럽 리더라는 직책 때문에 평소보다 꼼꼼히 책을 읽어 나가던 중이었다. 첫 작품 ‘깃털’에 바로 그 공작새가 등장했다. 예나 지금이나 선명한 이미지의 공작새가 나를 사로잡았다. 공작새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였는지, 꿈속에까지 공작새가 나타났다. 나무 위에서 풀쩍 뛰어 내려와서는 집안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공작새가 왠지 슈퍼맨 같았다. 주인인 버드 가족을 제 가족인 양 지켜주는 푸른 공작새 조이가 꿈속에서 밤새도록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꿈도 아닌, 환한 대낮에 공작새가 나를 쫓아다녔다. 혹은 내가 공작새를 쫓아다닌 건지 잘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북클럽 카페에 ‘깃털’ 관련 게시 글을 작성하느라 분주했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공작새 이미지를 찾아 편집한 후 들뜬 마음으로 게시 글을 올렸다. 작업을 끝내고 나자, 이틀 동안 부엌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배추 세 포기가 눈에 들어왔다. 더는 미룰 수 없어 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내게 김치 담그기란 엄청난 노력과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공을 들여 김치를 담가도 매번 실패했다. 소금에 절인 배추가 너무 짜서, 혹은 너무 싱거워서 항상 추가 작업이 필요했다. 김치 양념 역시 짜거나 싱거워서 간 조절을 다시 해야 했다. 그래서 김치를 담글 때면 항상 긴장했다.

 막김치를 담그기 위해 먼저 배추를 썰었다. 한입 크기로 배추를 써는 동안 ‘깃털’을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가로질러 버드와 올라의 집에 도착한 잭과 프랜 커플, 집 앞 나무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공작새 조이, 넉살 좋은 버드와 손님맞이 준비로 분주한 올라가 어색하게 첫인사를 나눴다.

내가 배추 절임물을 만드는 동안 네 사람은 거실에 장식품처럼 놓여 있는 울퉁불통한 치아 석고본을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버드가 괴이한 치아 석고본 때문에 멋쩍어했지만, 올라는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친부모도, 전남편도 방치한 못생긴 자기 치아를 교정할 수 있도록 버드가 돈을 대줬으며, 버드가 자신에게 해준 일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치아 석고본을 거실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올라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버드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 이들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두 컵의 소금에 물을 얼마나 부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완성된 절임물을 맛보니 적당히 짠 것 같아 썬 배추를 절임물에 부었다. 

내가 멸치 맛국물을 우려내서 찹쌀풀을 만들고, 마늘 두 통을 까서 다져 놓는 동안 네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로 저녁을 먹었다. 이때 재우려고 방에 눕혀 놨던 버드와 올라의 아기가 간간이 보채는 소리가 들렸다. 프랜이 아기를 보고 싶어 했다. 프랜의 간청에 못 이겨 올라가 방에서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못생겼다는 말조차 칭찬으로 여겨질 정도로 괴상하고 우람한 아기의 모습에 프랜과 잭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프랜은 아기가 신기하고 좋은 듯 아기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얼렀다. 그 사이 밖에서는 공작새가 집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자 공작새가 집 안으로 들어 와 아기에게 다가갔다. 공작새가 아기의 잠옷 윗도리에 머리를 넣고 장난치자 아기가 좋아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새가 자신이 부모인 양 아기가 잠들기 전 항상 이렇게 잠자리 의식을 치른다고 올라가 설명했다.

식은 찹쌀풀, 마늘, 다진 새우젓, 멸치액젓, 고춧가루, 설탕을 버무려서 김치 양념을 만들었다. 평소처럼 조리법에 따라 정확하게 계량하지 않은 채 내 맘대로 양념 재료를 넣어서 버무렸는데, 맛을 보니 입맛에 딱 맞았다. 이럴 수가! 한 번에 성공이라니! 

내가 배추를 틈틈이 뒤적이며 배추 숨이 죽기를 기다리는 동안 잭과 프랜이 적녁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떠났다.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올라가 프랜에게 공작새 깃털 하나를 선물했다. 시끄럽고 성가신 공작새, 흉측한 치아 석고본, 못생긴 아기를 마주한 그날 저녁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잭은 자기 처지가 버드보다 낫다며 우쭐해하는 것 같았다. 반대로 프랜은 무미건조한 잭과의 결혼생활에서 아기가 돌파구가 되어줄 것 같다고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녀의 심정이 어땠는지 자세히 파악할 수 없었다. 버드와 올라의 집에서 돌아온 그날 밤 두 사람은 아기를 갖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부모가 된 후, 잭과 프랜의 삶이 예전보다 더욱 불행해졌다.

오디오북을 끝낸 후 책을 펼쳐 읽었다. 읽다가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공작새에 대해 검색해 봤다. '공작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공작은 재성장과 회춘, 왕족, 존경, 명예, 성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또한 아름다움, 사랑, 열정의 상징입니다.' 이 문장을 읽고 있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자, 거봐'라고 말하며 공작새 한 마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숨죽은 배추 한 조각을 맛봤다. 알맞게 간이 밴 배추가 아주 달았다. 배추를 찬물에 세 번 헹군 후 소쿠리에 담아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마침, 재택 근무하는 남편이 일을 끝내고 2층에서 내려왔다. 얼른 남편을 낚아채 옆에 앉히고, 밑줄 그어 두었던 문장의 뜻이 무엇인지 차례차례 물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내가 수많은 질문을 해대다 보니 남편이 작품 하나를 통째로 읽은 것 같다고 했다. 해석이 어렵던 문장들까지 이해하고 나자 명쾌한 기분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당신은 버드 같아." 

내가 말했다.

"내가? 뭐 어떤 점에서?" 

남편이 물었다.

"내가 좀 이상한 일이나 하기 싫은 일을 부탁해도 언제나 들어주잖아. 버드처럼. 그렇다고, 내가 올라처럼 그 정도로 특이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서, 뭐, 좀 고맙다고. 아, 맞다! 우리 연애 초기에 나한테 이백만 원 빌려준 거 기억나?"

"아니. 전혀 기억나지 않아."

"내가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을 때 의사가 이것저것 치료를 권유해서 견적이 이백만 원이나 나왔었잖아. 그때 버드처럼 아무 고민 없이 바로 이백만 원을 내게 준 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내가 그랬어?"

남편이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하자마자 나에게 붙잡혀 시달리고 있었던 지라 마음이 급해 보였다. 

"나는 그때 무척 감동했는데, 정작 당신은 기억도 못 한다니. 나라서 이백만 원을 빌려준 게 아니라, 아무에게라도 그 큰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는 소리네?"

나의 외침은 성큼성큼 걸어서 자리를 뜨는 남편의 등 뒤에 메아리로 남았다.

드디어 물이 빠진 절임 배추를 양념과 버무렸다. 나를 남겨 놓고 사라졌던 남편이 한 시간 후 집으로 돌아왔다. 소고기 뭇국과 금방 담은 김치로 저녁상을 차렸다. 공작새가 식탁 옆에 서서 우리를 가만히 쳐다봤다. '사랑하라, 헌신하라, 성실하라, 성장하라.' 조용히 눈으로 말을 건네 왔다. 남편은 공작이 옆에 있는 줄도 모른 채 아삭한 김치 한 줌을 입에 넣으며 만족해했다. '김치 정말 맛있어! 고마워!'라고 말하는 남편이 오늘따라 좀 멋있어 보였다. 남편에게 한눈을 판 사이 공작새가 사라졌다. 식탁 옆 바닥에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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