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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May 20. 2022

보존

부부 사이 대화가 필요한 그대에게

이른 저녁, 마틴이 퇴근 후 집에 도착해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을 때, 마틴의 아내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아내의 발밑에서 어린 딸이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를 본 마틴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마틴의 아내는 남편을 보고도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왔어'라고  한마디 건넨 후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마틴은 아내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푸르스름한 창밖이 점점 어두워졌다. 딸이 야무진 손놀림으로 밥상을 뚝딱 차려서 마틴에게 내밀었다. 마틴은 플라스틱 스테이크를 집어 들고 꿀꺽 삼켰다. 마틴을 바라보는 딸의 큰 눈동자에 만족과 기쁨이 가득했다.

그날 밤 딸이 잠든 후, 마틴과 마틴의 아내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마틴의 아내는 저녁 내내 차가웠던 남편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 있냐고 여러 차례 물어봤으나 별일 없다고 대답하며 입을 다무는 남편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결국 마틴의 아내가 발끈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 왜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느냐고 쏘아댔다. 마틴은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당신은 항상 소파에 누워 있고 애 혼자 놀고 있어. 애랑 놀아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당신은 항상 그래. 우리가 뭘 같이 하자고 하면 늘 귀찮아하잖아.”

 정곡을 찌르는 마틴의 말에 마틴의 아내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잘못을 저지른 후 그 잘못이 언젠가는 들통날 것이라는 생각에 내심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았던 것인지, 정작 마틴에게 지탄을 받고 나니 마틴의 아내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애랑 한참 동안 같이 놀다가 피곤해서 잠시 소파에 누워 있었던 거야. 그게 뭐 잘못됐어? 잠깐 쉬지도 못해? 그리고 못마땅한 점이 있으면 그때그때 말하지, 왜 이렇게 속에 담아 놓고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내가 애랑 잘 놀아주지 못한다는 것, 나도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매일 피곤하고 힘들어. 체력이 바닥이야. 몸으로 놀아주는 게 정말 힘들어. 사실 어떻게 놀아줄지도 잘 모르겠어. 당신처럼 엄마랑 뭘 하면서 같이 놀아 본 기억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 당신 엄마랑 나를 비교하거나 당신 엄마 모습을 내게서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틴과 마틴의 아내가 결혼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솔직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서로 자라난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과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의 득과 실을 따져 보았다. 조곤조곤 두 사람의 대화가 자정까지 이어졌다. 딸에게 무심한 아내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용납하기 힘들어하면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마틴도, 좋은 아내와 엄마가 아니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마틴의 아내도 묵은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보존'을 읽는 동안 문득 해방감에 후련하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보존'은 갑작스럽게 실직한 후 처음에는 구직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샐리의 남편이 실직 3개월 차를 넘기면서 점점 무기력하게 좀비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실직 후 소파에서 기거하던 샐리의 남편이 소파를 떠나는 일이 점점 줄어들자, 샐리는 남편이 영영 소파에서 벗어날 것 같지 않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렇다고 해도 남편을 달달 볶지 않는다. 그저 인내하며 그런 남편을 지켜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샐리가 현실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샐리가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다. 소파에 누워 있는 남편과 잠시 인사를 나눈 후 샐리는 곧장 부엌으로 간다.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냉장고를 열어 본 샐리가 경악한다. 고장 난 냉장고 안에서 음식이 녹아 뭉그러지고 있는데도,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워 TV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남편은 무엇을 한 것일까. 정말로 소파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일까.’ 샐리의 마음에 불안이 깃든다.

샐리의 소란에 남편이 마지못해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살펴본다. 냉동 칸에 있는 음식을 모두 꺼낸 후 물기 가득한 냉장고 안을 닦는다. 일련의 소동에 함께 대처하는 듯 보인다. 고장난 냉장고와 부패 중인 음식을 보면서 샐리가 상황을 직시한다. 망가진 냉장고가 망가진 남편 또는 망가진 샐리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샐리가 당장 새 냉장고를 사자고 남편에게 말한다. 남편은 지역신문의 중고 판매 코너를 뒤적거리며 호응하는 척하지만, 정작 샐리가 오늘 밤 열리는 중고 가전제품 옥션에 가자고 제안하자 내켜하지 않는다. 샐리는 단호하다. 당장 냉장고를 바꾸지 않으면 위태한 삶이 무너질 것만 같다. 바깥바람도 쐬고 냉장고도 구입하고 일석이조라며 남편에게 옥션에 함께 갈 것을 한 번 더 권유한다. 남편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혼자라도 가겠다고 의지를 표명하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그러자고 대답하고 다시 소파로 돌아간다.

샐리는 부엌에 서서 소파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소파 양 끝으로 남편의 머리와 발만 덩그러니 삐져나와 있다. 샐리의 남편은 소파와 한 몸으로 합체되어 있다. 샐리는 마음이 분주하다. 저녁으로 포크찹을 굽는 동안, 이십 년 전 옥션에 함께 갔던 아버지가 떠오르고 어머니도 떠오른다. 냉장고가 망가진 건 불운이지만, 저녁 식사 후 옥션에 갈 것을 기대하며 샐리가 팬에 기름을 두른다. 지글지글 연기를 뿜으며 기름에 구워진 포크찹은 기괴하고 역겨운 모양을 하고 있다. 샐리는 어둑어둑해진 거실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남편의 머리와 발을 향해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고 말한다.

샐리의 남편은 구역질나는 포크찹을 보고도 젼혀 놀라지 않는다. 샐리가 남편에게 식탁에 앉아서 포크찹을 먹으라고 강요한다. 남편이 흉측한 음식을 보고 어떤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남편은 그저 식탁 앞에 묵묵히 서 있기만 할 뿐이다. 남편이 서 있는 발 주위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식탁 위에 올려놓은 음식이 해동되면서 생긴 물이 아래로 떨어져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다. 남편의 발과 물웅덩이를 응시하며 샐리는 망연자실한다. 립스틱을 바르고 코트를 입고 옥션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샐리는 남편의 발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두 발이 웅덩이 옆을 떠나 거실 쪽으로 걸어간다. 망가진 냉장고는 큰 입을 벌리고 두 사람을 쳐다본다.

샐리는 그날 밤 혼자서라도 옥션에 갔을까? 새 냉장고를 집에 들여 새 삶을 살게 됐을까? 소파와 합체된 남편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장난 냉장고처럼 버려졌을까? 아니면 소파와 분리되어 샐리의 새 삶에 동참했을까? 샐리의 남편은 소파에서 자신을 보존하기로 마음먹었고, 샐리는 망가진 냉장고를 혹은 남편을 바꾸면서 자신을 보존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나를 보존하고 있는 것일까.

마틴과 마틴의 아내가 소파에 앉아서 대화를 나눈 그날 밤 이후로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틴의 아내는 마틴이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 습관이 생겼다. 마틴의 아내는 여전히 원인 모를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어찌어찌 아이를 키우며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고 있다. 해결되지 않는 피로감 때문에 가끔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지만, 그래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대신, 밝은 대낮에 암막 커튼이 쳐진 방 안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잔다.

마틴의 아내와 반대로 마틴은 소파에 누워서 낮잠 자는 것을 즐긴다.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마틴의 아내는 소파를 네 차례나 바꾸었다. 마틴은 딱딱한 원목 침대에 눕기도 했고, 앉으면 푹 꺼지는 오래된 가죽 소파에 눕기도 했다. 그 후, 쿠션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가죽 소파를 거쳐 지금은 적당한 쿠션의 천 소파에서 낮잠을 즐긴다. 아내의 변덕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변덕을 부릴 때만큼은 아내가 잠시 피로감을 잊고 반짝이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틴은 불평하지 않는다.

마틴의 아내는 요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에 푹 빠져 있다. 마틴은 아내가 피곤하다고 한숨을 내쉬지만, 반짝이고 있음을 안다. 한번은 마틴의 아내가 마틴에게 물었다.

“왜 편안한 침대 놔두고 항상 소파에서 불편하게 자는 거야? 짧은 낮잠이라도 침대에서 편하게 자면 좋잖아.”

마틴이 대답했다. 

“나는 소파에 누워서 자는 게 좋아. 침대에서 자면 몸이 늘어지거든. 소파에서 짧게 자는 게 좋아.”

 마틴의 아내는 마틴의 구겨진 머리가, 소파에서 삐져나온 발이 가끔 안쓰럽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아기 같은 얼굴로 자는 남편이 고맙다. 마틴의 아내가 잠든 마틴의 발에 속삭인다. '나의 무기력과 피로감을 견뎌 내 주어서 고마워.' 마틴은 아내를 받아들이고 보살펴 주면서, 마틴의 아내는 남편에게 고마워하면서 서로를 보존하고 있다. 그 사이에 소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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