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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Jun 03. 2022

칸막이객실

부모 자식 문제로 고민하는 그대에게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했을 때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미국 이민 비자를 위한 인터뷰를 끝내고 경산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공들여 준비했던 인터뷰는 5분 만에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렇게 시시할 수가 있나 싶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기차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자니 비자 문제로 마음 고생하던 두어 달의 시간이 아프게 떠올랐다. 미국에 살러 간다는 게 드디어 실감 났다. 기차가 출발하자 온갖 상념이 몰려왔다.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이 기차가 어느덧 대전역에 도착했다.

기차가 정차하자 60대의 인상 좋은 어르신이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목례를 짧게 주고받은 후 다시 정적 속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어르신께서 말을 거셨다.

"어쩜 이렇게 참하게 생겼는지..., 혹시 결혼하셨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러웠지만 기분 좋게 대답했다.

"아, 네."

"아, 그렇구나. 우리 아들이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는데, 혹시나 하고 물어봤어요."

어르신께서 장가 못 간 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잠시 토로하셨다. 그러면서 내게 다시 물었다.

"자녀도 있어요?"

"네. 한 명 있어요. 초등학생이에요."

내가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였던 것인지 어르신이 내 대답에 놀라시면서 부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그 집 어머니는 얼마나 좋으실까. 이렇게 참한 딸이 결혼해서 손녀도 보시고...."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잠시 침묵하던 어르신께서 다시 말을 꺼내셨다.

"나도 딸이 한 명 있어요. 우리 딸은 이혼해서 애 데리고 혼자 살아요. 혼자 일하랴 애 보랴 고생하는 거 아니까 내가 자주 가서 집 청소도 하고 반찬도 해서 날라요. 집이 얼마나 엉망인지 몰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딸이 고마워하지 않아요. 생색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좀 서운해요. 딸이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속상해요."

어르신의 갑작스러운 신세 한탄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불쑥 나의 고백이 이어졌다.

"저는 엄마랑 연락하지 않고 지내요. 제가 고등학생 때 엄마가 집을 나가셨고 결국 아빠와 이혼하셨어요. 아주 뜸하게 연락이 한 번씩 오는데, 뭔가 필요하실 때만 연락하세요. 제가 딸을 낳았을 때도 보러 오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자매들끼리 서로 잘 챙기면서 지내요."

내 고백이 어르신께 위로가 됐는지 아니면 어르신을 더 아프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가족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게 어르신만은 아니라고 위로해드리고 싶어서 나온 고백인지, 아니면 내 아픔을 털어놓고 싶어서 말을 꺼냈던 건지 역시 잘 모르겠다.

"고생 많았네요. 그래도 어쩜 이렇게 잘 컸는지, 정말 대견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르신 얼굴에 위로와 온정이 담겨 있었다. 간간이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조금 나누다 보니 어느덧 구미역에 도착했다. 어르신께서 딸에게 전해 줄 반찬 꾸러미를 든 채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인자한 어르신을 보며 생각했다.

"내게도 이런 엄마가 있었으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칸막이 객실'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프랑스로 가는 기차의 일등석 칸막이 객실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 마이어스의 상념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불행한 가정사로 마이어스는 가족을 떠나 혼자 살고 있다. 어느 날 가족과 헤어진 지 8년 만에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에 적힌 'Love, Dad'가 마이어스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이어스는 용기 내 프랑스에 있는 아들을 방문할 겸 유럽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로마에서 시작된 여행은 몇 시간 만에 마이어스에게 외로움만 안겨줬다. 관광지를 혼자 쓸쓸히 걷다 보니 그룹 여행으로 계획을 짜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아내와 늘 함께 가자며 이야기를 나눴던 베니스 역시 실망스러웠다. 물때 낀 건물들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마이어스는 결국 밀라노의 4성급 호텔에서 TV로 축구 경기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탈리아 여행을 끝낸 후 마이어스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행 기차에 오른다. 아들을 만날 생각에서인지 마이어스는 좀처럼 잠을 청할 수 없다. 팔 년 전에 있었던 아들과의 일이 떠오른다. 그날 마이어스가 아내와 다투고 있을 때, 마이어스의 아들이 마이어스에게 힘으로 대들었다. '너에게 삶을 준 건 나야! 그러니까 그걸 다시 빼앗을 수도 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마이어스는 무력으로 아들을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어스는 자신이 아들에게 무력을 가했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다.

목적지까지 서너 시간을 남겨두고 마이어스는 더욱 생각이 많아진다. '역에서 아들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들을 안아야 할까?' 점점 마음이 불편해진다. '아니면 악수를 청할까, 8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그냥 웃을까, 어깨를 토닥일까, 그러면 아들이 몇 마디 하겠지? 만나서 정말 기뻐요, 여행은 어땠어요? 그러면 나는 뭐라고 대답하지?'. 마이어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엄마는 어떠니? 엄마에게 어떤 소식이라도 들은 게 있니?' 마이어스는 아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마이어스는 칸막이 객실을 벗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서 객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이어스는 의자에 두었던 코트 주머니에서 시계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아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같은 객실에 앉아 있는 남자 승객이 의심스럽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아니라고 잡아떼는 이상 따질 방법이 없다. 마이어스는 일등석 객실과 이등석 객실을 분주히 오가며 실마리를 찾으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객실로 돌아간다. 객실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화가 난다. 증오가 들끓는다. 불현듯 아들이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을 보러 가겠다고 기차에 앉아 있는 바로 이 순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어리석은 순간인 것만 같다. 8년 전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자신을 떼어놓은 아들이 정말로 보고 싶지 않다. 아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그날의 쓰라렸던 고통이 되살아난다. 아들은 마이어스의 젊음을 망쳤고, 그가 사랑해서 결혼했던 어린 여인에게 신경과민과 알코올 중독만 가져다줬다. 왜 자기가 싫어하는 아들을 찾아 이 멀리까지 왔는지 마이어스는 이해할 수 없다.

기차가 스트라스버그 역에 도착하지만, 마이어스는 결국 내리지 않는다. 몇 분 후 기차가  파리로 출발할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앉아 있다. 출발하는가 싶던 기차가 다시 멈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이어스가 일등석 기차 칸에서 나와 이등석 기차 칸을 향해 걷는다. 창밖을 내다보니 기차선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다. 덜커덩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기차가 다시 출발한다. 마이어스는 일등석 기차 칸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객실 안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마이어스의 일등석 기차 칸이 분리되고 다른 이등석 기차 칸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승객 중 한 명이 마이어스에게 얼른 와서 앉으라는 눈빛을 보내며 손짓한다. 자신이 타고 왔던 일등석 객실과는 달리, 이등석 객실은 분위기가 왁자지껄하고 활기차다. 마이어스는 자신에게 손짓한 승객의 옆자리에 앉는다. 스르르 잠이 온다. 외국어가 귓가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기차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마이어스는 어떤 사람일까. 8년 전 가정폭력 사건 이후 가족과 헤어졌고 그 후 그는 일등석 칸막이 객실과 같은 삶을 산 것 같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지만 타인과 교류하지 않는다. 마이어스의 삶을 틀어지게 만든 그의 아들이 마이어스가 묘사한 것처럼 교활하고 나쁜 아이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분명한 건 아들을 향한 마이어스의 증오와 원망이 8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래도 자식인데, 아버지가 궁금해서 팔 년 만에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그런 아들을 외면한 마이어스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렵다. 마이어스가 기차에서 내리지 않기로 한 이유가 아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들을 여전히 증오한다기보다는, 아들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짐작한다. 마이어스와 그의 아들이 참 가엽다.

실수로 타게 된 이등석 객실에 앉아 이방인의 어깨에 기댄 채 곤히 잠든 마이어스가 내 모습 같다. 마이어스가 아들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는 것처럼 나 역시 엄마를 향한 감정이 명확하지 않다. 미움과 원망이 희미해졌지만, 다시 만날 때 웃어 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덜컹거리는 이등석 객실에 앉아 마이어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묻어두고 외면한 감정을 마이어스 앞에서라면 꺼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곁에서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삶의 애환을 스스럼없이 나눌 것이다. 미로처럼 얽힌 선로 가운데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정한 삶인 것 같지만, 가끔은 전혀 예기치 못한 선로 위에 서게 된다. 그 길 종점에는 삶의 환희도 있고 지울 수 없는 고통도 있다. 가는 길이 쓸쓸하지 않게 동행하는 이가 있으니 다행이다. 누구라도 부디 홀로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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