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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Jan 19. 2023

비타민

불투명한 미래로 삶이 막막한 그대에게


반으로 나뉜 화면에 두 여자가 등장했다. 두 여자의 퉁퉁 부은 다리가 막대기처럼 뻣뻣했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무거웠다. 두 여자가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섰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여자가 조명을 켰다. 한 여자는 소파에 누워, 또 다른 여자는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적막이 두 여자의 몸을 감쌌다. 두 여자는 울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방 모퉁이에서 절망이 두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한 여자는 1970년대 미국에서, 또 다른 여자는 1990년대 한국에서 동시에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두 여자는 직감적으로 이 전화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챘다. 희망을 부여잡듯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았다. 수화기를 들자 저절로 말이 쏟아졌다. 덤덤하게 두 여자의 독백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어렸을 때 말이야, 내가 커서 비타민 방문 판매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어. 너무 끔찍해. 어떤 식으로 해석해 봐도 최악이야."

"나도 내가 홈플러스에서 메주를 팔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 그래서인가, 그냥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더 최악인 건 말이야, 심지어 자면서도 비타민을 팔아.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비타민이 나를 잠식해. 미쳐버릴 지경이야. 너는 적어도 꿈속에서까지 메주를 팔고 있지는 않잖아?"

"아직 메주 파는 꿈을 꾼 적은 없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데? 너 정말 힘들겠어. 그런데 말이야, 자려고 누우면 다리가 너무 무거워. 그러면 아, 여기가 현실이구나 싶어. 꿈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던 현실이 나를 짓누르고 비웃는 것 같아."

"내 밑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들이 하루 심지어는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둬. 낯선 집 초인종을 누르고 비타민을 사달라고 애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나라고 쉬웠을까. 많은 애들이 일하겠다고 찾아왔다가 얼마 못 가 사라져. 사라지는 만큼 또 많은 애들이 일하겠다고 찾아와. 영업 목표를 위해 구호를 외치지. 마법 주술처럼. 효과가 없어. 요즘은 비타민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없어. 나만 홀로 판매자이자 고객이야"

"하루 종일 구린내가 나는 못생긴 메주 앞에 서 있어. 어르신들이 힐긋 메주 한번, 그리고 나를 한번 쳐다봐. 찌뿌둥한 얼굴로 나한테 말해. '젊은 아가씨가 장이나 담글 줄 알아? 그런데 메주를 팔고 있으니.' 생뚱맞다는 눈초리로 쳐다볼 뿐 아무도 메주를 사지 않아."

"내 얼굴이 너무 누리끼리하지 않아? 비타민 과다복용 부작용인가? 비타민을 하도 많이 먹어서인지 변비까지 생겼어. 뭐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낮에 대학 동기가 찾아왔더라. 저 멀리서 내 이름을 외치며 반갑게 달려오는데 얼마나 난감하던지. 메주를 팔고 있다고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신문에서 내 얼굴을 봤대. 식당에서 회사로 점심 배달을 시켰는데, 알루미늄 쟁반을 덮은 신문에 내 얼굴을 짜잔! 장 담그는 날에 대한 기사 코너에서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메주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대. 나란 걸 알고 동기들이 얼마나 웃어 젖혔을까. 날 놀라게 하려고 밥 먹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온 애들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참나."

"나 좋다고 고백했던 레즈비언 쉴라가 사라졌어. 포틀랜드로 떠난대. 요즘 왜 다들 포틀랜드로 떠난다고 난리인 걸까. 거기에 뭐가 있다고. 그나마 일을 좀 하던 애였는데. 도나 마저 떠난다고 하면 어쩌지? 그래도 붙잡을 수는 없지. 다들 먹고살아야 하니까. 비타민은 팔리지도 않고."

"홈플러스 매니저가 나에게 오늘은 메밀가루를 팔래. 내 월급은 메주 공장에서 나오는데 말이야. 너무 치사하지 않아? 하루 종일 메밀전을 구웠어. 메밀전을 구워서 잘라 놓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잽싸게 달려들어. 그러고는 그냥 쌩 가버려. 하루 종일 메밀전을 굽고 자르고 하다 보니 눈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야."

"병원에서 잡일 하는 남편은 맨날 술이야. 오후 늦게 출근하기 전에도 술을 마시고, 늦은 밤 퇴근하기 전에도 술집에 들려 술을 마셔. 냠편 머릿속에 술만 들어 있는 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내가 비타민에 깔려 죽겠다는데도 관심이 없어. 애리조나로 떠나서 새출발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지만 그냥 말뿐이야."

"점심 휴식 시간이 한 시간이야. 이때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작은 방에서 잠시 쉬거든. 아줌마들 입담이 장난 아니야. 음담패설과 상스러운 웃음이 방 안에 가득해. 아줌마가 되면 나도 음담패설에서 쾌락을 찾으며 무료함을 견디게 될까."

"결국 도나도 일을 관뒀어. 포틀랜드로 떠나겠대. 정말이지 포틀랜드에는 뭐가 있는 것일까. 약장이 비타민으로 포화 상태야. 도나 같은 애를 또 어디에서 찾지? 남편과 애리조나에 가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설날이 지나고 나니 아줌마들이 서로 메주를 사겠다고 난리야. 심지어 깨진 메주 조각도 서로 갖겠다고 싸워. 석 달 동안 마네킹처럼 서 있기만 해서 월급 받는 게 미안했는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레이먼드 카버의 '비타민'에서 패티는 비타민 방문판매원이다. 패티는 비타민에 집착하고 남편은 술에 의존한다. 애리조나에서 새출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아무 문제도 없는 일상이다. 어느 날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고 개선하고자 했던 패티가 직업을 갖기로 했다. 그러나 멋진 커리어 우먼의 꿈을 안고 시작한 직업이 오히려 패티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비타민 방문판매 사업이 순조롭지 않았다. 패티는 자나 깨나 비타민 생각 때문에 괴롭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패티가 꿈과 현실을 지각하지 못한 상태로 화장실에 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패티가 약장을 열었을 때 비타민 약병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이 장면을 목격한 남편도 그제야 그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패티와 패티의 남편은 애리조나로 떠났을까. 그곳에서 새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가난하고 배운 게 없어 자립이 힘들었던 패티, 쉴라와 도나, 그 외 수많은 여자아이에게 현실은 혹독했다.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고 하지만, 빈부 격차와 남녀 차별 등 여러 가지 환경의 장벽을 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 이들은 막연한 꿈이라도 쫓아야 했다. 뚜렷한 목표 없이 들뜬 꿈을 앉고 먼 길을 떠났던 어린 여자들의 삶이 과연 어땠을까.

1997년 겨울, 나는 홈플러스에서 메주 판매 사원으로 석 달가량 일했다. IMF 여파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시기에 등 떠밀려서 하게 된 일이었다. 살면서 가장 추웠던 겨울이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내가 번 돈은 가족 생활비와 동생 학비로 쓰였으니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고, 지금 돌아보면 값진 경험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그 당시 어린 여자였던 나는 빨간 티셔츠에 앞치마를 메고 메주 옆에 서 있던 게 부끄러웠다. '너의 꿈은 무엇이니?', '화가, 선생님, 현모양처입니다.'라고 말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면서 꿈을 이루지 못한 내가 무척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새로운 꿈을 꾸었을까?

몇 가지 꿈을 꾸었고, 그중 몇 개는 이루었고, 몇 개는 포기했다. 겁 없이 꿈을 꾸고 행동에 옮기던 시절, 나는 얼마나 당당했던가. 현재 나는 미국에서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엄마가 되면서 양육을 핑계로, 또한 언제 남편의 나라인 미국으로 떠날지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를 무기로, 한국에서 살 때부터 지금까지 꿈꾸지 않은 지가 15년째다. 지금 와서 보니 결국 나는 나이 많은 패티가 되어 있다, 그것도 미국에서 말이다. 꿈을 꾸고 싶으나 눈앞에 그려지는 게 없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잃었다. 

이국땅에서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린다. 메주 팔던 어린 나를 불러낸다. 무모하게 꿈을 쫓던 나를 다시 만난다. 계속 쓰다 보면 다시 꿈꾸는 날이 오리라, 작은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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