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기 닥친 시련 앞에서 고민하는 그대에게
내 배에는 3개의 칼자국이 있다. 거무죽죽하고 오돌토돌한 자국이 9년 전에 비하면 많이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눈에 거슬린다. 복강경으로 자궁 근종 수술을 하면서 생겨난 흉터다. 배에 작은 구멍을 내서 수술하기 때문에 수술 자국이 흉하게 남지 않는다는 경험담과 달리 내 배에 그려진 못생긴 흉터는 오랫동안 나를 우울하게 했다.
4년 만에 받은 산부인과 검진에서 자궁 근종을 발견했다. 대략 9cm로 내 주먹만 한 크기라서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수술이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자궁 근종 수술을 받은 주변 사람들의 경험담을 수집하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미친 듯이 검색했다. 수술 후기 수십 개를 읽고 또 읽었다. 악몽 같은 2주가 지난 후 대학 병원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근종이 자궁 외벽에 있어 수술이 어렵지 않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안심이 되었지만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불운이 닥치면 잘잘못을 따져 보게 된다. 온갖 추측과 억지에 머리가 팽팽 돈다. 처음에는 어떻게 4년 만에 주먹만 한 크기의 근종이 자라날 수 있는지 신기하면서 믿기지 않았다. 4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산부인과 의사가 떠올랐다. 2년마다 받아야 하는 정기 검진을 건너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때 그 의사의 불친절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안내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정기 검진 외에 여러 가지 추가 검사를 받는 게 어떻겠냐고 유도했을 때, 그냥 정기 검진만 받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였는지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나를 쳐다보는 의사의 눈빛과 태도가 무척 차가웠다.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했을 때도 의사는 말하기 귀찮다는 표정으로 겨우 한두 마디 대답할 뿐이었다. 산부인과를 나서는데 정말 불쾌했다. 사람이 아니라 돈이 우선인 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그로부터 2년 후, 검진 대상자였지만 건너뛰고 말았다. 내 자궁은 깨끗하다는 어리석은 자신감, 또 다른 산부인과를 물색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귀찮음, 그리고 좋은 의사를 찾기 어렵다는 회의감 때문이었다. 내 자궁에 근종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지 꿈에도 몰랐다.
의사에 대한 억측이 끝나자 나에 대한 질타로 넘어갔다. 그간 건강 관리에 소홀했던 나를 돌아보며 후회했다. 내가 먹고 마신 게 무엇인지 되짚어 봤다. 운동은커녕 몸을 별로 움직이지 않아서 탈이 난 것 같았다. 나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니 이런 내가 싫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교과서적인 생활 습관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게 나만은 아니잖아? 나도 적당히 남들처럼 먹고 자고 노는데, 딱히 뭘 그렇게 내 몸을 방치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척 답답했다.
제일 큰 문제는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간단한 복강경 수술이라고 하지만 수술 도중 뭔가 잘못될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분이 자궁 근종 수술 중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이웃에게 전해 들었다. 그런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딸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수술을 앞둔 내게 지인들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잠시 기운이 났지만, 억측과 자책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딸의 피아노 선생님께서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수술하신다면서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이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그냥 이런 일은 살다가 이유 없이 일어나요.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불행한 일이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하필 내게 왜' 이런 생각 하면서 괴로워하실 필요 전혀 없어요.”
피아노 선생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를 괴롭히던 시름이 스르르 녹는 듯했다. 어리석은 내 아집과 교만에 날아온 명쾌한 해답이었다. 그렇다. 내가 뭘 잘못한 게 아니다. 그냥 자궁 근종이 생긴 것이고 안타깝지만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이런 불운이 왜 하필 내게 생겼냐고? 내가 뭐 길래, 나는 그런 불운을 겪으면 안 되는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거야? 아니잖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난리법석 떤 나 자신이 무척 어리석고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런데 피아노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말씀을 내게 하게 된 것일까? 피상적 위로 대신 내게 딱 필요한 삶의 이치를 전해 주신 피아노 선생님의 통찰력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자책하는 내 마음이 피아노 선생님 눈에 보였을까? 어쩌면 피아노 선생님도 나와 비슷한 상황을 일찌감치 겪으셨기에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피아노 선생님의 온화한 미소와 애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이 별것 아닌 '작은 것'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던 세 사람이 어느 깊은 밤, '작은 것', 그러니까 따뜻한 커피와 시나몬 빵을 앞에 놓고 한자리에 앉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정을 넘어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이어진다. 서로 남이었던 세 사람이 운명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된 건 끔찍한 비극 때문이다. 불운이 예고 없이 이들을 덮쳤다.
앤은 아들 스카티의 여덟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러 빵가게에 갔다. 명랑하게 들뜬 앤과 달리 중년의 제빵사는 시종일관 무뚝뚝했다. 며칠 후 스카티의 생일날 아침, 스카티가 등굣길에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다친 곳은 별로 없었지만, 스카티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순탄하게 성공 가도를 달리며 행복한 삶을 이루고 있던 앤과 헤럴드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시련이 덮쳤다. 앤이 의사에게 스카티 상태가 괜찮은지 물을 때마다, 의사는 검사에 이상이 없으니 스카티가 곧 깨어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병원 관계자들은 모두 사무적인 태도로만 대할 뿐, 아무도 앤의 심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앤과 헤럴드는 스카티가 코마 상태에 빠진 것 같아 무척 불안했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앤과 헤럴드가 교대로 늦은 밤 집에 가서 집안일을 챙기는 동안, 영문도 모르고 제빵사는 전화를 해댔다. 생일 케이크를 찾으러 오지 않아서 화난 상태였다. 제빵사가 처음에는 말도 하지 않고 불쑥 전화를 끊어버렸다. 스카티는 결국 의식을 잃은 지 사흘 만에 영영 떠나버리고 말았다. 앤과 헤럴드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빵사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왜 너의 스카티를 찾아가지 않느냐고 언성을 높이는 남자의 말을 듣고 그제야 앤은 늦은 밤 걸려 온 이상한 전화들이 제빵사의 짓임을 알게 되었다. 며칠 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앤과 헤럴드는 곧장 제빵사를 찾아갔다. 스카티의 죽음을 알게 된 제빵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위로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앤과 헤럴드에게 갓 구운 시나몬 빵과 커피는 별것 아니지만 벅찬 위로였다. 제빵사의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로 앤과 헤럴드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제빵사 역시 앤과 헤럴드 앞에서 자신의 고단한 삶에 대해 털어놓았다. 낯선 세 사람이 하나로 이어졌다.
피아노 선생님의 말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서 나를 지켜 주었다. 제빵사의 커피와 시나몬 빵 역시 앤과 헤럴드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 따뜻한 안식처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되어 인생을 덜 쓸쓸하게 한다. 힘들 때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별것 아닌 것이 정말로 소중하다. 배에 난 흉터를 오랜만에 들여다보고 있자니 잊고 지내던 피아노 선생님의 말이 다시 생각난다. 수술 후 좀 겸손하게 사는가 싶었는데 언제 이렇게 다시 교만해졌는지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나 자신이 보인다.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난이 나를 언제라도 덮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두렵기 짝이 없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과연 '작은 것'이 막강한 힘을 정말로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하고, 살아가는 데 '작은 것'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거기에 더해져야 할 것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 그리고 그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나'일 것이다.